내 소임을 다했다. 드디어 나로 돌아간다. 급속도로 노화하고 있어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휘영청 달빛 속, 그저 외로운 그 아이, 휘를 보았을 때 오해하고 말았네. 분명 연수를 본 첫날. 네 머리 위로 떠오르는 금빛 가루를 보았는데도 한참을 기다려 학년 말이 되어서야 연결을 시도했었어. 시작은 편지로. 그런데 소정이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해가 바뀌어 버리고서야 연결이 되었네. 내 이번 생에 마지막 연결은 곰인형을 통해서였지. 눈이 부시지 않게 희미한 조명만 켜 놓고 오랜 기간 나랑 살았던 곰인형에 내 금빛가루를 가득 담아 네게 주었어. 곰인형이 널 휘감을 때, 네 표정을 찍어놨어야 했는데. 다 가져가더라. 나의 에너지를.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었어.
네게 완벽히 가야 할 에너지가 중간중간 휘에게 분산되었는데, 목표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한 눈을 판 적이 언제였더라. 몇 백 년은 지난듯하네. 이리 드문 일인데 어쩌다가 휘에게 분산되었을까. 혹 휘와 다른 연이 이어져 있는 걸까? 어쩌면 연수와 강력한 연이 있을 수도 있지. 아, 이젠 좀 쉬어야 해. 휘가 나로 인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 곧 떠날 존재라 오랫동안 널 돌봐줄 수가 없어. 어차피 연수와 내가 연결되었으니 네가 연수랑 이어진다면 좋은데. 그래서 부탁했는데.
두 아이가 만난 이후, 휘는 내게서 떠나갔다. 원하던 바이긴 하나 나도 마음이 있는 존재라 신경이 쓰인다. 연수가 휘에 대해 물어보지만 난 그저 "휘가 나에게선 떠났다"라고만 한다. 너와는 지속되겠지? 대답이 없네. 뭐지? 만남이 별로였나? 분명 끌렸을 텐데. 연수가 오랜 마주함 끝에 입을 연다. "아마도 영원히요" 하며 배시시 웃는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마음이 좀 놓이네. 휘가 여자 볼 줄은 안다니까.연수야 믿는 구석이 있지.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 연수. 후... 너란 녀석은.
난 이제 사라지련다. 당분간. 어떻게 시나리오를 써야 될까 머리를 써 본다. 그냥 사라져도 되는데. 이런 연수가 걸리네. 넌 뭐지? 날 그냥 사라지게 못하게 하네. 묶고 있구나. 강력하게. 사랑이란 감정 모르는 건 아냐. 음... 사실 나 누군가를 사랑했다 할 수 없네. 내 임무였을 뿐. 아... 연수야. 이상해. 내가 네게 한 행동, 규칙에 어긋나. 그 사회에 맞게 모범적으로 행동할 것. 절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말 것. 난 어땠지? 널 교무실로 불러 보란 듯 무릎에 앉히고 볼을 쓰다듬었어. 사실 입맞춤도 아쉬워서 많이 자제한 건데.정신 차려야지.나야 떠날 사람이니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넌 이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내가 미쳤어. 미안하구나. 휘란 녀석도 너완 상관없는데 내 욕심이고. 내가 멀었구나. 아직도. 이래서 계속 살아나나 봐. 완전히 없어지면 좋으련만 다시 존재하니. 증오한다, 날. 그런 내가 사랑하는 이와 연결되어 살아나니 날 또한 죽도록 사랑한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네 상실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된다. 어떤 식으로 이별해야 하나. 완벽한 이별은 아닌데, 몸만 사라질 뿐, 내 생의 불꽃은 네 속에 타오르다 네가 생을 다할 때 다시 내게 온단다. 나의 생이 완전히 끝나는 게 언젠지 나도 몰라. 어떤 존재인지도, 그저 계속 없어졌다 나타난다. 이 세상의 여러 종류 사랑을 하기도 하는데 한 사람과의 만남에 정해진 기간이 있어서 내겐 사랑은 곧 이별을 뜻해. 안녕, 내 사랑 연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