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lias Jan 22. 2024

레미제라블은 시간을 타고...

뇌는 기억한다

오전 10시 반에 출발해서 오후 4시에 도착했다(점심도 먹고 차도 막히고 네비는 있으나마나 길도 헤매고 ㅎㅎ).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보려고 오랜 시간 차를 탄 후, 바람을 맞으며 걸었더니 피곤했나 보다. 오후 7시 30분 공연이라 저녁을 일찍 먹어 배까지 부르니 잠이 확 쏟아졌다.

레미제라블을 보자고 처음 말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늦게 말을 꺼내 좋은 자리는 예약이 다 되어 있어서 취소되는 자리를 예약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결과는 4열 1장, 11열 2장. 남편은 눈이 안 좋은 내가 4열에서 보기를 원했지만 유니는 반대했다. "아니야, 어차피 우리는 거기나 여기나 비슷해. 잘 안 보여. 아예 확실하게 밀어주자고. 아빠라면 확실히 눈물까지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레미제라블의 원픽은 아빠잖아~" 맞다. 남편은 레미제라블 다섯 권을 완독 했다. 남편은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이후 시리즈 완독이 흔하지 않은 일이기에 레미제라블을 좋은 자리에서 볼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나는 유니와 11열에서 보느라  잘 안 보이니 오히려 귀가 열려  연주와 노래에 집중할 수 있어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미션 시간에 뻑뻑해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데 유니가 묻는다.

"잤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서 어떻게 자. 아무리  피곤해도...!"

어! 익숙하다. 분명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는데... 레미제라블은 시간은 달려  오래전 시간으로 날 데려갔다.


유니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전, 늦은  밤까지 우리는 책과 놀았다. 한글을  늦게 깨친 유니는 한글책이든 영어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어달라고 가져왔다. 심지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된 책까지. 그 당시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면 구매욕구를 이길 수 없었기에 집에는 다양한 나라의 그림책이 많았다. 한글책은 수월하게 읽으면 되지만 영어책은 대충이라도  번역해 가며 읽어주느라 정신이 또렷해졌다. 문제는 전혀 해석이 안 되는 책들이었다.

오늘과 비슷한 겨울밤, 프랑스어책을 그림만으로 상상을 발휘하며 책을 읽어주다 졸았나 보다. 시간이 새벽 3시도 넘었으니 졸릴 만도 하다. 꾸벅꾸벅 머리가 꼬꾸라지며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유니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침이라도 흘렸나 내 상태를 점검할 때까지 유니는 신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간 민망해진 내가 말했다.

"우리 유니~ 안 졸려. 엄마가 깜빡 졸았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보는데 어떻게 졸려...?"



"잤어?"라는 유니의 말에 나의 뇌는 오래전 기억을 불러와 유니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와 유니에게 있어 아름다운 책을 보면  그 속에 녹아들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상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럽고, 참 좋다는 기억이 내 속에 살고 있었나 보다. 나의 말, 유니의 말이 아닌 우리의 말로 엉켜 그저 행복했던 시간들로.


신경학자들은 한 번 경험한 일들은 뇌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있었던 일은 아예 없었던 일처럼 잊히거나 삭제될 순 없다. 누군가 에게 상처나 기쁨도, 내가 누군가에게 준 슬픔이나 행복도 뇌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니는 피곤한 엄마(눈을 감고 있는)와 숭고한 예술이라는 맥락에서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나 무의식적으로 동일 반응을 했으리라. 이론상으로 어릴 적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요즘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신기해할 때가 많다. 나의 말과 행동이 으니와 유니에게서 나오고 내게서 아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우리는 진행 중이다. 서로를 뇌에 새기며 알아가기를. 마음에 품기를.


오늘, 몸은 유난히 아픈데 마음은 따뜻하. ^^








작가의 이전글 사춘기 딸과 홈베이킹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