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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라이크 Sep 09. 2019

모순의 관계

가장 닮았지만 다른 두 사람, 모녀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BEST 3을 뽑으라면, 물론 친구도 좋아하는 작가도 있겠지만. 그중 단연 1위는 엄마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서 만난 첫 보호자이자 친구이자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로 성장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엄마 딸임을 강조하면서, 부정했다. 사춘기엔 말할 것도 없다. 내 인생에서 부모(특히 모)는 부담스러운 존재이자 귀찮은 존재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훈육하려 했다. 중학생이면 머리가 클 때로 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온전한 독립체가 되기 위해 나의 뿌리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것의 첫 타깃이 바로 ‘엄마’였다.


사춘기의 나는 정말 막무가내였다. 엄마 아빠 번호를 핸드폰에서 완전히 지우기도 했고(물론 이미 번호를 다 외우고 있었지만) 센 척을 하겠다며 엄마 아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다. 나는 정말 나 스스로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춘기의 표본이었다. 엄마는 그때마다 울고 소리 질렀지만, 다시

“예쁜 내 딸.”

이라며 내게 돌아오곤 했다. 얄밉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엄마와 아빠는 자신들이 더 이상 내 삶에 필요가 없어질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말도 안 된다고 웃지만, 부모님에게 전화하지 않는 내 모습을 가끔 자각할 때면 정말 내리사랑은 없는 것인가 깨닫곤 한다.


오늘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5살 3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탔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 아이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5살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아빠가 바로 자신의 맞은편에 있고, 엄마가 대각선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동생에게 관심을 두는 순간, 눈에 난 상처를 비벼댔다.

“엄마는 우리 아가가 아픈 거 싫으니까. 그만하면 안 될까?”라는 말을 듣고 싶은지 아이는 엄마에게 “아야”를 계속 난발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에 “호오~” 바람을 불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옆에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나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엄마는 왜 안 앉고 손잡이를 잡고 있어요?”

아, 아이가 왜 지하철에 탈 때부터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봤는지 깨달았다. 책 읽는 내가 신기해서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이에게 나는 엄마가 자신의 옆에 앉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일 뿐이었다. 그래서 5역 정도 더 가야 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일어나 다른 칸으로 옮겼다. 그 부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엄마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갓난 아기 때는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엄마의 보호 안에 있었고, 친구 또는 학교 생활이 힘들 때. 엄마는 미묘한 나의 목소리 차이만으로도 내가 힘들다는 걸 바로 눈치채곤 한다. 그래서 더 중요하고 힘든 일은 정작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힘든 것보다 두 배로 그녀는 아파할 테니까.


그렇게 엄마와 나를 부정하다가 사랑하다가 동일시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엄마가 완전히 나와 타인이라는 생각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엄마가 행복하다고 꼭 내가 행복한 것도, 내가 행복하다고 엄마가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를 위한 배려가 엄마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고, 그녀가 행복해지면 내가 행복한 가정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헛된 망상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생겨도 엄마는 나를 위해서 버티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엄마의 자유를 찾아 떠나라 권했다. 지금 내 나이에 이미 엄마가 되어 살아온 그녀가, 진짜 자신이 원하는 꿈을 가지고 살기 바랐다. 나를 위해 희생해온 시간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죄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이미 살아온 그 자체로 소중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원하는 혁신적인 변화가 아닌 지금을 잘 맞춰가는 변화를 택했다.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의 선택을 내가 강요할 수 없다는 것과 내 권유대로 한다고 그녀가 정말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결국 타인인 것이다. 

뮤지컬 <메디슨 카운티 다리>(원작 영화도 있다)의 내용은 미국 촌구석에서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해오던 엄마가 사랑하는 남자(이방인)를 만나고 자신의 꿈을 깨달으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엄마는 결국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남기를 택한다. 남편과 자식들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그 행복이 꿈보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메디슨 카운티 다리>의 평들은 "엄마도 여자였다."라는 평이 많았다. 반항심 가득한 나는 '불륜'이라는 소재를 미화하려는 수작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엄마는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이기에 흔들리고 결정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선택을 나는 존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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