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무렵 <혜화동>을 처음 듣던 날
노랫말과 곡조가 이렇게 잘 어우러질 수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참으로 예쁜 노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떠오르던 옛 동네, 옛 친구, 찬란했던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
우리 헤어지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냐, 어떻게든 자주 보자며 격렬하게 포옹했던 이별의 순간이 무색하게, 우리들의 만남은 시간이 갈수록 뜸해졌다.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또 다른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가느라 기억 속 큰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나 보다. 과거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래와 함께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둘째 아이의 중학교 졸업식.
아들의 반 친구들이 무대로 올라가 다 함께 불렀던 곡이 바로 <혜화동>이었다.
아름다운 전주에 맞춰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수건을 꺼내 옆사람에게 들킬세라 눈치를 보며 눈물을 훔쳤지만, 이미 나의 안구는 빨개지고 어느새 눈두덩이까지 부어올라 누가 봐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그런 얼굴이 되어버렸다. 옆에 있던 남편이 왜 이렇게 많이 우냐고 조용히 속삭였지만, 흐르는 눈물은 이미 나의 의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둘째 아이의 출생일은 12월 30일이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 중에서 아마도 생일이 가장 늦을 것이다. 물론 하루 더 늦게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제일 막내이겠지만 그 당시 12월에 아이를 낳은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것이 염려되어 1월로 출생 신고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느 학년이나 12월생인 아이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제 날짜에 출생신고를 하였고, 그렇게 같은 학년의 끄트머리에서 출발한 둘째 아이는 체력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늦되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나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된 중3 아들의 사춘기는 내 인생 역대급 태풍이었다.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가 자랄 때와는 사뭇 다른 사춘기의 위력에 적잖이 당황했었는데 둘째와 비교해 보면 첫째의 사춘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
나는 거의 매일 울었다.
내가 엄마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펐다.
시간이 갈수록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으며 '내가 사라지는 것이 더 나을까?'라는 생각을 참으로 오랫동안 했었던 것 같다.
점점 멀어져 가는 아들과의 관계에 졸업식에 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을 때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 부부는 함께 졸업식에 참여했고 나는 <혜화동>을 부르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토록 예쁘고 소중한 내 아들.
초등학교 시절 또래아이들보다 유난히 작아 친구들로부터 어린아이 취급을 당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놀이에서도 끼워주지 않았던 친구들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마나 외로운 마음이었을까.
엄마인 나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뒤늦게서야 알아차렸고,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있었다.
곡의 흐름이 애잔해서였을까,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아들을,
그나마 멀리에서라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감정에 나는 울컥했던 걸까,
아니면 아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까.
참으려 할수록 이놈의 눈물은 눈치도 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둘째 아이는 그 이후로 키가 쑥쑥 자랐다.
물론 아직도 마른 체형이긴 하지만 이제 기죽지 않을 만큼 컸고, 아빠 키를 앞지른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가늘고 짧기를 바랐던 사춘기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굵고도 길게 자리 잡아 모두를 힘들게 했지만, 그 또한 지나갔다.
이제 직업군인이 되어 2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는 울 아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서 마주한 그 아름다웠던 <혜화동>은 아픔과 사랑이 함께 녹아내린 또 하나의 추억을 내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