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다, 작년 이맘때쯤 사무실 창밖 풍경에 매료되어 휴대폰 앨범 속에 담아두었던 사진 한 장을 찾아 마주했다.
그리고 오늘 그날의 기록을 꺼내본다.
사무실에서 직원이 내 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웃더니 시선을 창문 쪽으로 향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우와"하며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뿜어냈던 탓인지 일하고 있던 다른 직원들도 이내 창 밖을 보고는 똑같은 함성을 터뜨린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이 예쁘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컴퓨터와 마주했지만 등 뒤 창 밖 풍경이 아른거려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귤피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번엔 아예 의자를 돌려, 대놓고 창밖의 눈 축제에 합류한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붕어빵 생각에 미소를 지어본다.
사실 이렇게 붕어빵이 생각난 건 조카인 정민이와 주고받은 오전의 카톡 때문이리라.
절친의 결혼식이 있어 지난주 한국에 도착한 조카가 재래시장에 나가 붕어빵을 샀다며 카톡으로 인증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아래에는 '한국 겨울 버킷리스트 ⋁'라는 메모가 달려 있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붕어빵의 자태를 보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올 겨울에는 반드시 먹고 말리라.
고급지게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낸 붕어빵이 아닌,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김 폴폴 나는 리어카의 팥붕어빵을 말이다.
그리고 그날의 붕어빵 사진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처럼 지난날의 추억 하나를 물고 와 내게 행복을 선사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분당의 아파트 입구에는 중국호떡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우리나라 호떡과는 다르게 기름에 튀기지 않은 그 호떡은 어린아이의 얼굴만큼이나 큰 대형 호떡이었다.
그 무렵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입덧으로 인해 많이 힘들어했었는데 당시 7살이던 첫째는 그런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집안일들을 도와주었다.
가끔 집 앞 슈퍼에 들러 간단한 시장보기 심부름을 해주기도 했는데 슈퍼에서 집으로 오는 중간 정도 거리에 바로 그 중국호떡 리어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도 첫째는 나를 대신해 식빵과 우유를 사가지고 왔다. 까만 비닐봉지와 잔돈을 내게 건네주며 작은 목소리로
중국호떡 하나만 사주면 안 되냐고 했다. 집으로 오는 길 호떡 리어카를 지나쳐 오기가 쉽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10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고(그 당시 천 원으로 4~5개를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뜨거울 테니 조심해서 사 오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옷을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서는데 첫째가 빈 손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1000원을 다시 내게 돌려주며 말했다.
주문을 하지 못해 그냥 왔다며 아저씨와 아줌마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주문하는 걸 보았는데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표현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웃 친구에게 그 부부가 청각장애를 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말하는 순간 그제야 그 사실이 생각났다.
아이에게 설명이 필요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귀가 많이 아프셔서 소리를 잘 들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손가락으로 호떡의 개수를 알려드릴 수밖에 없다고, 내일 다시 돈을 줄 테니 그렇게 주문해서 사 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엄마, 그런데 어른한테 말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얘기해도 되는 건가요? 아줌마 아저씨가 마음이 안 좋으실 것 같아요."
리어카의 손님들이 손가락으로 주문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예쁜 마음을 가진 우리 딸, 정말 예쁘다.'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얘기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줌마, 아저씨가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말 대신 손가락으로 주문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줌마 아저씨는 호떡을 파실 수가 없고 또 손님들도 호떡을 살 수가 없는 거라고.
그리고는 아이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줌마 아저씨가 들을 수는 없지만 '호떡 주세요'라고 공손하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개수를 알려드리고, 호떡을 받아서 나올 때 '감사합니다'하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면 우리 **이 기분도 좋고 아줌마 아저씨도 웃어주실 거라고.
다음날 아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검은색 호떡봉지를 끌어안고 밝은 표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꼬맹이었던 울 아이는 서른이 되었다.
경쟁력 심한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입시전쟁을 치러냈고 대학 졸업 후 취업대란을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역시 녹록지만은 않은 사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선하고 따뜻했던 어릴 적 그 순수했던 마음을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오늘의 현실에서는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비록 지금은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맘 속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