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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Apr 24. 2023

4. 스트레스 폭주, 그리고 상실감

                                                                                                 사진: Unsplash의 JD Designs



3개월이 흘러갔다.

말일이 되어 입고 마감과 함께 정산 마감도 잘 마무리했다.

이제 곧 새로운 달이 시작되기에 본사로부터 새로운 자료를 전달받아야 했다.

지금은 본사 컴퓨터에 접속하여 직접 처리하고 있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구축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우리에게 권한 허용이 되지 않아 본사에서 자료를 업로드하고 연락을 해주면

그 이후 업무를 진행했었다.

월말이 되었는데 연락이 없어 나는 m님에게 본사에 요청해 놓으라고 얘기했고 잠시 후 완료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날은 5월 31일이었고 하루 뒤인 6월 1일부터 새로 받은 자료를 사용하면 되었기에  나는 그날의 다른 업무를 보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남편이 나를 불렀다.

남편은 본사와 연결된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본사에서 보내준 파일이 열려 있었고, 남편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열려있는 파일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나는 화면을 확인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물어보았다.

"5월 내용은 5월 파일에, 6월 내용은 6월 파일에 올려야 하는 거잖아요!" 하면서 큰소리를 냈다.

당연한 얘기였다. 그걸 모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영문을 몰라 화면을 한번 더 쳐다보았다. 나는 그 파일을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

남편은 다시 한번 더 소리쳤다.  

"5월은 5월에, 6월은 6월에!"

대부분의 자그마한 사무실이 그렇듯 우리 사무실 역시 각자의 자리가 파티션으로만 분리가 되어 있었기에 조그맣게 얘기하는 소리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그런 구조였다

남편의 큰소리에 직원들이 의식되었던 건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

나는 남편에게 "좀 조그만 소리로 말하면 안 되나?"라고 했던 것 같다.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시라고요! 지금 6월 파일에 5월 내용이 저장되어 있는 거 안 보이냐고요!"


지금은 아니지만 남편은 초창기에 나에게 높임말을 썼는데,

아마도 회사에서는 가족이 아닌 대표와 직원이라는 사실을 직원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높임말이라는 것이 일상의 대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겨질지 모르나,

화를 내거나 소리를 높여 얘기하는 경우에는 정말 기분 좋지 않은 비아냥으로 들렸다.

남편의 얘기가 맞았다. 6월 파일인데 5월 내용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업무이지만 나는 아직 그파일을 열어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거라면 보내준 쪽에서 6월 자료에 5월 파일을 복사하여 붙이고는, 내용을 지우지 않은 채 보내준 것이라는 건데, 아주 기초적인 그 생각이 왜 그 순간 떠오르지 않았을까. 

갑작스러운 남편의 큰소리에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일시정지되었던 것 같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경험부족이다. 

고작 내가 한 말이라고는 이거 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한 거 아니라고요... 였다.


지금의 나라면 그거 내가 한 게 아니라 말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내 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지우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지금이라면.... 

하지만 나는 남편의 그런 모습을 결혼한 후 처음 보았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머리는 멎어버렸고 오로지 직원들 앞에서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건 ㅇㅇ님 업무인데  (회사에서 남편은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나를 ㅇㅇ님이라고 불렀다.) ㅇㅇ님이 안 했다고 하면  누가 했단 말이에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했을 리가 없다고, 오로지 나의 실수라고 못 박고 있었다.

급기야 눈치 없는 눈물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나는 한번 더 얘기했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 사람은 나의 말을, 나를 믿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제 나의 말은 듣지 않는다.  나를 믿지 않는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던 거였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빙빙 돌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다문채로 서 있었다.

연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러니까 제자리로 가서 일 제대로 하시라고요!"

그리고는 내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참했다. 나는 순간 내 모습이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y님 앞에서 내 남편은 나를 바닥까지 내몰았다.

몇 걸음 안 되는 나의 자리가 그날은 왜 그리도 멀게 느껴졌는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부디 내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게 자리에 앉은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행여 우는 소리가 다른 직원들의 귀에 들릴까 봐 나는 휴지 여러 장을 뽑아 눈과 코를 막았다.

일의 자초지종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 머릿속은 서러움, 창피함 아니 원망으로 가득 찼다.

와이프가 아닌 직원으로서라도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하면 한 번쯤은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직원들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런 수모를 받으려고 이 자리에 온 건가?

그런데 모든 감정이 '화'로 바뀌기 시작한 순간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 내가 오전에 M님을 통해 본사에 자료 요청을 하지 않았던가? 잘못 보내온 거였다



내가 먼저 그파일을 열어보고 확인만 했더라면, 

남편이 나의 말을 믿어주고 다른 사람이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만이라도 했다면, 

본사 쪽에서 잘못 보내준 거라는 생각이 컴퓨터 화면을 보자마자 생각났더라면, 

남편의 호통에 머리가 하얘지지만 않았더라면.. 

후회의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단순하게 웃고 넘어갈 일이며 아무 일도 아닐 일이었다.

그 자료가 6월로 넘어가서 새 일에 지장을 준 것도 아니고

그날은 5월 31일이었고 6월의 업무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사회생활 5년 차에 접어든 지금, 남편처럼 꼼꼼하게 일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누가 실수를 했든 새로운 달이 시작되기 하루 전에는 모든 것이 정리되어 제자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저쪽에서 제대로 된 자료를 보내줬어야 했었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확인하여 제대로 잡아 놓았어야 하는 거였다. 누군가가 열어보기 전에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도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신경이 무척이나 날카로워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꼭 그렇게까지 해서 내게 일을 가르쳐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씁쓸한 마음이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3번이나 얘기했는데도 믿어주지 않았던 남편,

제자리에 가서 일 제대로 하시라며 소리 질렀던 남편.

바로 그날 나의 자존심은 직원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남편이 나를 믿어주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나로 하여금 남편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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