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도시락이 사라졌다.

자매라는 선물 2

by 돌콩마음

사진 : Pixabay의 Lynn Neo



우리 삼 남매는 모두 두 살 터울이다.

그렇기에 학년 또한 2학년 차가 당연하겠지만, 3월 1일생인 나는 7살에 입학을 하여 언니와는 한 학년, 동생과는 세 학년의 차이가 난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라 불리던 시기에 입학했지만 초등학교라 칭하기로 함)에 입학했던 당시에는 1학년 입학기준이 8살이 되는 출생 연도 3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1일까지였으므로 나는 전교생 중 생년월일이 가장 늦은 학생이었다.

한 반의 인원이 60명이 넘었던 그 시절 우리 학교는 생년월일 순으로 번호를 정했기에 나의 번호는 언제나 학급인원 수와 일치했다. 예를 들어 내 번호가 69번이면 학급정원이 69명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체력이 달렸고 키가 제일 작아 전체조회나 체육시간 늘 맨 앞자리에 섰다.

나와는 반대로 언니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나는 언니의 긴팔과 긴 다리를 몹시 부러워했었다.


남동생.

동생의 키는 부러움을 초월하는 길이였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우량아였던 남동생은 주변사람들로부터 <남양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가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키와 관련된 여러 가지 썰 중

어릴 적 키가 크면 나중에 안 자란다는 말은 언니에게 해당되었고,

어릴 적 키 작은 아이는 때가 되면 한꺼번에 쑥쑥 큰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었다.

이 두 경우와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자라는 아이가 바로 남동생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키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남동생은 35년 전인 고등학생 때 186cm로 정점을 찍었으니 그 시절에는 정말 큰 키였다. 비록 시간은 많이 흘러 키가 줄어드는 나이가 되었다지만 줄어봤자 여전히 그 언저리다.


암튼 초등학교 당시 키 큰 언니와 더 키 큰 남동생사이에서 제일 앞자리를 고수했던 나는 '꼬맹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사진: SK텔레콤 공익광고 '나란히 앞으로'


가끔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란히'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선생님께서 "앞으로 나란히"를 외치시면 모든 학생이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줄을 맞추었다. 하지만 제일 앞 줄의 학생은 앞으로 손을 뻗는 대신 옆구리에 손을 얹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6년 내내 단 한 번도 앞으로 손을 뻗지 못했다. 이 슬픈 이야기는 다음 글에 계속될 예정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마루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엄마가 마련해 주신 간단한 간식을 먹은 후 집 앞 골목으로 뛰어 나갔다. 이미 나와있는 아이들, 조금 늦게 나온 아이들, 어느 누구도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그 시간이면 늘 동네 아이들로 골목이 북적였다.

이미 바닥에 그려져 있는 오징어모양 중심에 삥 둘러 선 아이들이 인원수를 확인한 후 가위 바위 보로 편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인원을 뽑는 순간이 다가온다. 작고 약했던 나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겨져 있었고 가위 바위 보에서 진사람이 슬픈 표정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오징어 잡기 놀이를 싫어했다. 아니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놀이 도중 옷이 찢기거나 무릎이 까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스러웠던 그 놀이를 나는 언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늘 동참했다.

운동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잘했던 언니를 나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언니가 중학생이 되었다.




일명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를 배정받던 그 시절 언니는 최악의 결과를 통보받았다.

우리 동네는 중학교, 고등학교가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 많은 학교를 코 앞에 두고 지명이 다른,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중학교에 당첨된 것이다.

결과를 알고 펑펑 울던 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늘 함께 등교하던 언니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언니는 반복되는 원거리 통학에 무척 힘들어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보다 훨씬 늦어진 하교시간에 만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니는 책가방과 보온도시락을 마룻바닥에 던져놓고 교복을 입은 채 한동안 소파에 누워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실컷 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TV만화에 빠져 있었다.

딩동 소리에 "언니 왔다!"를 외치고 대문으로 달려가 언니를 맞이했는데 뭔가 여느 때와는 다른,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집안으로 들어와 언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

한 손에는 가방과 신발주머니, 다른 한 손에는 보온도시락이 들려 있어야 했는데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보. 온. 도. 시. 락. 이 사라졌다!


아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니의 양손은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방과 신발주머니, 그리고 몸통을 잃어버린 보온도시락의 .

끈은 왜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왔던걸까?

궁금했지만 언니의 마음이 더 속상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토큰을 내고 버스를 타던 바로 그 시절,

설 수 있는 공간이 전혀 보이질 않는데도, 끊임없이 줄지어 올라타던 마법의 만원 버스시절,

올라타기도 어려웠지만 내리기는 더 힘들었던 바로 그 시절,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지나치고 내린 어느 정류장에서 신세한탄하며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와야 했던 그 시절,

언니는 사력을 다해 그 비좁은 공간을 뚫고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리는 임무에 성공했다.

하지만 언니의 보온도시락은 언니와 함께 내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 녀석은 주인이 내린 것도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옆구리 사이에 굳건히 자리 잡고서는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리라.


웃기고도 슬픈 그 시절이 그립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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