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하루 Jun 08. 2019

기생충의 적은 과연 누구인가

영화 기생충 관람 후기 및 전격 해부하기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최근 작품들 중에서 큰 이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봉준호 감독이 워낙 한국 영화계에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의 전작들(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등)을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대할 법한 영화였다.

  개봉 후에 많은 사람들이 들려준 스포 없는 후기는 바로 '침묵'이었다. 영화가 끝났는데 다들 말이 없었다, 영화 관람 후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조용한 건 처음이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와 같은 감상평들이 이어졌다. 사실 봉준호 감독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 최근 논란이 되었던 여성혐오적인 발언들을 포함해서(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자) -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영화에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영화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말문을 막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내가 받은 느낌은 영화가 자! 끝! 하고 끝나버리니까 할 말이 없지, 였다. 기생충은 완결성이 무척 높은 영화였다. 기승전결을 확실하게 매듭짓고 영화가 끝나기 때문에 그 뒤에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 이 아래의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셨거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경우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서 영화를 곱씹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점점 늘어났다. 숨겨져 있는 메타포나, 반복적으로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 메시지가 점차 뚜렷해져서 숨을 죄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기생충에서 의미를 두었던 장면들과, 꾸준히 반복되던 상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1. 영화의 구조 ; 기생충의 적은 숙주가 아니었다


  기생충의 구조는 좀 이상하다. 분명 영화 소개는 '전원 백수인 4인 가족의 장남이 굉장한 부자인 4인 가족의 딸의 고액 과외를 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두 가족의 이야기'인데, 전반적으로 이 두 가족은 대립하지 않는다. 전원 백수 가족은 일방적으로 박사장네에게 학력 위조, 경력 위조 등의 사기를 치며 전원 취직이라는 쾌거를 얻어낸다. 박사장네는 이런 뒷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전원 백수 가족은 박사장네가 그들의 돈줄이기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가장 기택(송강호 역)은 박사장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갈등'은 언제 발생하느냐 하면 바로 지하에 있는 문광(이정은 역)과 근세를 만나게 되면서다. 백수 가족이 반지하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면 근세는 그보다 더 아래, 말 그대로 '지하'에 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한다. 문광이 근세를 지하 벙커에 살게 했다는 사실이나, 백수 가족의 취직이 모두 사기였다는 걸 박사장네가 알게 되는 순간 두 가족은 생존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생충의 구조가 이상한 지점이다. 이 영화는 분명 백수 가족과 박사장네를 번갈아가며 비추는 방법을 통해 가난한 자들의 삶과 부유한 자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폭우로 인해 집이 침수되고 체육관에서 밤을 보내는 이들과, 폭우가 내려도 비 한 방울 새지 않는 아동용 텐트. 무전기로 대화하는 부자와, 지하실에서 모스부호를 찍어대는 이들. 수재민 구호물품 중에서 옷을 고르는 이들과, 옷방에서 오늘의 의상을 고르는 이들. 노상 방뇨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비가 오면 물이 다 들이차는 좁은 창문과, 푸른 잔디밭과 맑은 하늘을 보여주는 넓은 유리창. 4인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으면 꽉 차 버리는 거실과, 앉은자리보다 빈자리가 더 많은 식탁.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나열된다.

(좌) 백수 가족의 식탁 / (우) 박사장네 집의 식탁

  그런데 대체 왜, 이들이 적대감을 드러내고 서로 물어뜯는 대상은 '지하'에 사는 사람일까? 기생충의 갈등은 곧 반지하와 지하의 갈등이다. 못사는 사람과, 더 못사는 사람의 대립. 잘 사는 사람은 그 갈등에서 아예 벗어나 있다. 오히려 문세는 리스펙!을 외치고 기택은 감사와 미안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 기생충의 적은 숙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두 명의 기생충이 한 명의 숙주를 공유할 수는 없기에 기생충들은 서로 목숨을 걸고 다툰다. 결국 '갑'은 그들의 생존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고, '을'만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구조가 되고 만다.

  영화를 통해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봉감독의 가치관에 따르면 이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관람하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기생충을 통해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박사장의 입에서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이 정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2. 캐릭터 ; 여배우의 재발견과 'pretend'


  앞에 '여'라는 글자를 붙이는 걸 당연히 선호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저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상 기생충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들은 모조리 여배우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특히 문광 역의 이정은 배우, 기정 역의 박소담 배우, 마지막으로 연교 역의 조여정 배우까지. 물론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지 한참 된 배우들이지만 이번 영화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인물은 기정(박소담 역)이었다. 기정은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보이는 인물이다. 박사장네에서 갑과 을의 권력구조를 뒤집은 인물도 기정뿐이며,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 인물도 기정뿐이다. 남다른 카리스마로 연교(조여정 역)를 휘어잡고 순식간에 우위를 차지한다.

내이름 제시카 일리노이 시카고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한데, 폭우로 집이 잠겼을 때 기정이 찾는 것은 화장실 천장에 숨겨둔 담배와 꼬깃꼬깃 접힌 비상금이다. 그리고 구정물이 역류하는 변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이 장면은 내게 기생충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들 중 하나인데, 기정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난리가 나고, 변기는 울컥울컥 시커먼 물을 뱉어내는 동안 그 위에서 기정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 속의 짧은 휴식을 갖는다.

  게다가 기정은 뻔뻔하고 능청스러울지언정, 가장 좋은 결과를 위해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문광과 근세에 대해 기택은 계획이 없고, 기우는 죽이려고 들지만, 기정만이 '서로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한다. 이 영화 안에서 '함께 사는 삶'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것도 기정인 것이다.

예쁜 사람은 두 번 보기

  이런 기정이 백수 가족 중 유일하게 죽음에 이르는 건 속된 말로 '꿈도 희망도 없다'는 느낌을 준다. 기정은 문광의 죽음에 대해 가장 책임이 적은데도 근세에게 제일 먼저 칼을 맞는다. 그리고 돌을 두 번이나 머리에 맞은 기우는 살고, 기정은 죽는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계급 사회의 전복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박사장네 가족들은 'pretend'라는 단어로 포괄된다. 기우(최우식 역)와의 2번째 수업에서 다혜는 "걔 다 척이라니까요!"라고 다송의 이야기를 하며, 그런 다혜에게 기우는 pretend, 즉 ~인 척하다 라는 단어를 넣어 영작을 하라고 말한다. 박사장(이선균 역)은 줄곧 선을 지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에는 '선을 넘었던 사람'의 것을 찾는다. 연교는 까다롭고 사람을 가리는 척 하지만 실상 가장 순진하다. 다혜는 과외 선생님과의 연애에 로망을 갖고 있고, 다송은 앞서 다혜가 말했듯이 예술가인 척을 하며 지낸다.

  어쩌면 pretend가 단순히 부유한 계급의 이중적인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발  더 나아가자면 결국 인간의 본질은 다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백수 가족들이 다 시침을 뚝 떼고 명문대생인 척, 베테랑인 척하는 것처럼 그들도 결국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가족사진 옆에 걸려있는 다송의 그림

  이 점은 연교가 자화상이라고 말한 다송의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다송의 그림은 자신의 생일날 밤에 보았던 지하실의 근세를 그린 것이다. 기우가 침팬지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문광이 근세에게 먹인 것이 젖병 속 우유와 바나나였던 것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교는 다송이 근세를 그린 그림을 보며 자화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상류층이 하층민을 보고 그린 그림을, 상류층이 직접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것. 이 또한 결국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3. 메타포 찾아보기 ; 야, 이거 진짜 상징적인 거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봉감독의 별명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기생충에는 정말 치밀할 정도로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숨어 있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의도를 찾으려면 '반복해서 나오는 것'에 집중해보면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냄새와 계단이다. 기생충에서 냄새는 아무리 감춰도 드러나고야 마는 가난의 흔적을 말한다.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도, 심지어 상대방이 그걸 다 믿고 있어도, 스멀스멀 나타나고야 마는 가난의 흔적. 박사장이 냄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순간부터 기택은 자꾸만 자신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아무리 맡으려 해도 스스로의 냄새는 맡을 수 없다는 걸. 그 냄새는 내 가난을 알리고 싶지 않은, 나와 다른 사람일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냄새라는 소재가 탁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영화는 후각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직접 냄새를 맡지 않아도 우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올린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 반지하나 지하실에 들어갈 때 나는 냄새, 물기를 제대로 말리지 않은 옷에서 나는 꿉꿉한 냄새, 결국 각자가 경험했던 '가난'의 냄새를.

  학창 시절 가난한 아이를 가장 쉽게 판별해내는 방법 또한 냄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에 대해 ' 냄새나요!'라고 말하는 경우를 누구나 한 번쯤 접했을 것이다. 그 나이대의 아이가 냄새가 난다는 건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대부분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경우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냄새가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가장 쉽게 보이는 메타포는 계단이다. 영화 기생충은 끊임없이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끌어 나간다. 계단은 영화 속에서 계급에 대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기택과 기우, 기정이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걸 보면 넓고, 낮고, 평평했던 박사장네의 계단을 떠올리게 된다.

  이 계단은 단순히 계급 간 격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 '이동'을 의미한다. 백수 가족의 집은 반 지하에 있지만, 박사장네의 집은 언덕을 올라가고 또 계단을 올라가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다. 백수 가족은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또 폭우 속에서는 정말 끝없이 내려가지만 (대체 언제까지 내려가나 싶을 정도로 내려간다.) 박사장네 부부는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마트도 가고, 캠핑도 가고, 외출도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지는 않는다. 상류층은 하류층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박사장의 집은 높은 곳에 있다.


  세 번째로 눈에 띄는 건 인디언인데, 이 인디언이라는 소재는 마치 다송의 천진난만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지만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연교는 두어 번 다송의 인디언 장난감(화살, 텐트 등)이 미제라고 이야기한다. 인디언에게 있어 미국인의 존재는 질병과 폭력을 투하하며 그들을 괴롭힌 지배 계급이다. 그러나 다송은 아무렇지 않게 미제 인디언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의 상처와 분노에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흥미와 재미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백수 가족이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탁자 밑에 숨어들 때, 박사장네 부부는 소파 위에서 쾌락을 탐닉할 수 있는 것이다. 지하실에서 매일같이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도 현관등이 불량인가 하며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또, 근세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보낸 모스부호를 다송이 해석할 것처럼 보여주다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것 역시 피지배층의 간절함이 지배층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마지막에 기택이 인디언 모자를 쓰고 풀숲에 숨어 있을 때, 결국 인디언 = 백수 가족이 된다. 인디언이 칼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도, 미국인은 그저 차를 운전하라고, 차키라도 던지라고 윽박지를 뿐이다. 그 말에 기택은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차키를 줍기 위해 근세의 시체를 치우다가 코를 틀어막는 박사장을 보고 순간적으로 우리의 칼끝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겨우 알아챈 기택은 그 칼로 박사장을 찌른다. 이 장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생충에서 하층민과 상류층이 부딪치는 장면이다. 그 이후 지하실로 숨어들은 기택은 박사장에게 미안하다며 울고, 다른 숙주에 기생하며 삶을 유지하고, 그 삶에 순응해버린다.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소재는 '수석'이다. 영화 초반 친구가 가져온 수석은 가족에게 재물운을 가져다준다는 돌이다. 결국 그 돌이 모든 칼부림의 원흉이 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수석을 처음 본 기우는 "이거 되게 상징적인 거네."라고 말한다. 기우는 몇 번 더 상징에 대해 언급하는데, 감독이 대놓고 관객에게 상징성에 대해 찾아보라고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수석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 기우가 말하는 '수석이 달라붙은 거예요.'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독의 의도를 단정 짓기보다는 각자 자유롭게 해석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기생충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바로 물에 잠긴 집에서 기우가 수석을 잡는 부분이다. 돌덩이, 그것도 무거운 돌덩이가(지하실에서 떨어뜨리거나, 계곡에 돌을 버릴 때를 참고하면 돌 자체는 분명 무겁다.) 대체 어떻게 물속에서 떠올랐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있다는 것, 그것도 꽤나 중요하게 연출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다. 이 돌이 수면 위로 올라온 건, 감독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집에 물이 들이찬 그 순간에 기택은 아내의 메달을, 기정은 담배와 비상금을, 기우는 수석을 잡는다. 다시 말해 기택은 과거를, 기정은 현재를, 기우는 미래를 붙잡는다. 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저지른 사건을 수습해야 하고, 그 책임감은 기우에게 가서 달라붙는다. 왜냐하면, 믿었던 아버지의 계획이 사실은 무계획이기 때문이다. 기택은 가장으로서 무력한 사람으로 보인다. 직업도 없고, 아내가 욕을 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곰팡이 난 식빵을 뜯어먹으며, 피자박스는 4개 중 1개가 불량(다 같이 접는 것과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그 불량이 기택의 것임을 짐작해본다.)이다.

  '계획'이라는 말도 기생충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기택이 기우를 보며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말하기도 하고, 충숙이 문광에게 "계획은 있니?"라고 묻기도 하며, 기택이 "가장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마따나 계획하면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는 게 이 세상이다. 그리고 계획에는 항상 그 계획을 한 사람이 있으며, 계획이 망했을 때 그걸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수석은 기우에게 달라붙었을지도 모른다. 기택은 계획이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다. 그렇게 기우는 책임을 들고 다시 지하실로 향한다.

  물에서는 두둥실 떠올라 달라붙었던 수석은 지하실 계단에서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삑사리 예술을 좋아하는 감독은 영화 내내 삑사리를 활용하는데(숨어서 문광과 충숙의 대화를 엿듣다가 넘어지거나, 수석을 계단에서 떨어뜨리거나) 이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때 수석은 다시 한번 하강의 이미지를 가지며 파국을 예견한다. 그렇게 결국 그 책임감은 기우의 머리를 깨뜨리는 흉기가 되었고, 맑은 날의 칼부림을 불러오는 시작이 되어버린다.

  마지막에 기우는 수석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놓는다. 수석이 의미하는 바가 다양한 만큼 이 장면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기우가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냈을 수도 있고, 상류층으로의 계급 이동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우는 영화 내에서 반복에서 '이 집에 어울리는' 것을 갈망한다. 기정에게 너는 진짜 이 집이랑 어울린다, 고 칭찬하기도 하고 지하실로 향하기 전 다혜에게 자신이 여기에 어울리냐고 묻기도 한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도 기우가 지하실로 향한 이유는, 스스로 내린 결론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깨어난 기우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웃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기우는 '경찰같이 생기지 않은 경찰'과 '의사같이 생기지 않은 의사'라는 말을 한다. 어떤 직업에 어울리는 생김새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기우는 그저 부유하고 안락했던 그 공간에, 명문대생이라는 그 지위에, 폭우가 쏟아졌어도 고기를 굽고 첼로를 켜는 그 사람들 속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걸 받아들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수석 이야기로 돌아와서 수석을 돌려놓은 것에 대해 마저 이야기해보자. 영화 초반 지략가처럼 보이던 기우가 수석을 들면서부터 다소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럴만한 사건을 겪은 뒤이긴 했지만 수석을 돌려놓고 난 기우는 어딘지 개운해 보인다. 기택의 편지를 해석하고 꿈을 꾸는 기우는 행복하게까지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의 미래를 기우가 쓴 전하지 못할 편지에서처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집을 사서 기택을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게 하겠다는 기우의 꿈이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기생충'이다.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은 상영 시간 내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박사장네 가족은 숙주고, 백수 가족과 문광-근세 부부가 기생충이라는 것을. 그들은 '공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생'하고 있다. 백수 가족은 박사장네를 속이고 들어왔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긴 하지만- 문광은 아무도 모르게 근세를 숨겨뒀다. 영화 내내 그들이 숨거나, 네발로 계단을 기어오르거나, 비를 맞고 터널 안을 걸어가거나 하는 모습들은 제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근세가 지하에서 올라와 칼을 쥐고 정원으로 나가는 장면은 기생충이 숙주의 몸에서 나가는 것과 같다. 아주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근세는 햇살을 보며 눈을 한 번 찡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두른다. 그리고 백수 가족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충숙의 무기에 찔려 죽는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와중에도 눈 앞의 박사장에게 리스펙을 외친다. 그 몸부림이 정말로 기생충의 무언가와 닮아있어서 더 오싹하게 다가오는 장면이다.

  기생은 보통 한쪽에게만 유리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실, 동물이나 곤충들의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기생충이 죽으면 숙주도 함께 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기생충도 마찬가지였다. 기생충이 숙주의 몸에서 벗어나자 박사장도 이내 칼에 찔리고 만다. 근세는 죽었지만 기택은 여전히 그 집의 지하 벙커에서 생을 연명한다. 숙주가 죽어도, 기생충은 새로운 숙주를 찾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관계가 한쪽에게만 유리한 관계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4. 설국열차;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


  아무래도 사회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보니, 봉감독의 전작 중에서 '설국열차'가 계속 생각이 났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열차는 수평의 공간이고, 계단은 수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계급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고르자면 당연히 수직일 것이기에, 설국열차보다 다소 적나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설국열차의 경우 맨 꼬리칸에 있는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있는 맨 앞 칸까지 달려가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항쟁이고, 저항이며, 투쟁이다. 그들은 물과 식량을 통제하고 아이들을 빼앗아가는 지배계급에게 분노할 줄 알고, 싸울 줄 안다. 마침내 맨 앞칸에 도착했을 때 '사회적 구조'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남기며 반전을 꾀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설국열차에는, 희망이 있었다.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에 팔을 희생하면서 아이를 구했고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는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반면 기생충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끝없이 내려오기만 한다. 처음에는 필라이트를, 중간에는 수입맥주를, 마침내 박사장네에서 양주와 각종 술을 마시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사정이 나아진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한 때의 꿈일 뿐이다. 돌아오는 박사장네 가족들을 피해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숨어 다녀야 하고, 돌아와서 한숨 돌리려는 집은 물에 잠겨 있다. 뭔가 나아질 것 같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사라지고, 또 사라진다.

  기생충은 하층민에게 선을 긋고, 그들을 인간 이하 취급하는 상류층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상류층은 갈등 구조에서 빗겨나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이고, 사실상 영화에서 피해를 입은 것도 그들인 것처럼 보인다. 한 순간 기택이 박사장에게 칼을 꽂기는 하지만 지하실에서 다시 미안하다고 말한다. 상류층은 대립 구도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으며, 약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인다. 그나마 약자끼리의 소통이 가능하려나 했던 기정의 말은 연교에 의해서 막힌다.

  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럭으로 연명하던 설국열차의 승객들과, 자신이 벌레 같은 존재가 되어 살아가는 기생충의 가족들. 마침내 끝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내렸던 사람들과,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삶에 순응하는 사람.

  기생충은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꿈도 희망도 단 하나도 남겨주지 않았다.


5. 총평 ; 함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는 왜 모두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지 못할까. 왜 현실에서는 약자와 약자가 작은 파이를 두고 싸워야 하며, 정작 넘칠 만큼의 파이를 갖고 있는 강자에게는 분노하지 못하는 걸까.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학력으로, 인맥으로, 그 외의 것들로 계급이 나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신분제도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우리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며 이 사회에 아직도 계급이 나뉜다는 걸 알고 있다. 영화 기생충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동시에, 그걸 알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시킨 이 영화가 씁쓸하고 비참하다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씁쓸하고 비참하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영화와 '반대로' 하면 된다. 약자는 약자를 적대하지 않고, 서로 연대해야 하며, 작은 파이를 두고 다툴 것이 아니라 파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기우는 그 집을 사겠다고 꿈을 꾸었지만, 나는 아무도 지하에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그 지하로 뛰어내려가 손을 붙잡고 햇빛으로 함께 나아가는 세상을 원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기생도 공생도 아닌 '상생'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