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엑시트, exit의 발음을 한글로 적어둔 이 영화는 말 그대로 103분 동안 '출구'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영화였다. 재난 영화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보여주는 영화는 많았지만 관객에게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엑시트는 그 지점에 있어서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용남(조정석 역)은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위해 온 가족이 모인 연회장에서 유독가스가 살포되는 재난을 맞닥뜨린다. 연회장 직원이자 용남의 산악부 후배인 의주(임윤아 역)와 함께 그 재난 속 출구를 향해 끝없이 도망치는 게 영화의 스토리다.
스토리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영화는 담백하다. 복잡하고 세세한 설정, 혹은 재난 영화에 자주 나타나는 웅장한 스케일은 전부 삭제되어 있다. 유독가스로 인해 죽는 사람들은 앞부분에 아주 잠깐 묘사되고, 그 이후로는 시체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 하나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재난이지만 영화는 철저히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흘러간다.
재난 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엑시트의 인물 중에서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은 주인공 두 명 정도다. 하지만 나머지 인물들 역시 한없이 인간적이며, 평범하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 지나치게 입체적인 인간상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망가진 인간의 모습을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재난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잔혹한 짓을 하는 건 인간적인 게 아니다. 벼랑 끝에 몰려 떨어질까 봐 겁을 내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엑시트는 너무도 따스한 눈으로 사람을 그려낸다.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먼저 구조하려는 부모와 자식이 있다. 부지점장이기에 손님을 먼저 구조하려는 프로 의식이 있다. 둘은 학원에 갇혀 우는 아이들을 보고 겨우겨우 마주한 헬기 앞에서 등을 돌린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보다 등장인물 다운 그들은 헬기를 보내고 피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에 용남과 의주는 히어로가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온다. 엑시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특히 눈여겨본 캐릭터는 분량이 많은 용남보다 의주였다. 의주는 올 여름 국내 개봉 영화에서 유일한 여성 주연이었다. 의주는 극 전반적으로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곁다리가 아닌 한 명의 등장인물로서 당당히 자리한다.
초반부부터 의주는 용남에 비해 '길을 잘 찾는' 인물로 그려진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행동파로 움직이는 건 용남이지만, 그들이 가야 하는 방향과 길을 끝없이 제시하는 건 의주다. 둘의 캐릭터성이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덧붙여, 그런 그녀가 계단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한 하이힐을 벗고, 츄리닝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순간 약간의 전율을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엑시트가 끝난 직후에 가장 먼저 한 말은 '잘 만들었다.' 였다. 진짜 잘 만들었으니까. 재난 시 대피요령의 교과서로 써도 좋을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위급 상황에 쓸 수 있는 정보를 끝없이 습득해간다. 그런데 교육 영상을 볼 때처럼 지루하지 않다. 너무 완벽할 정도였다.
영화 초반 가스통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말에 직원인 의주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건물 내부에 비상벨을 누르는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왜 뛰어가는지를 궁금해했던 나는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건물 옥상으로 가는 동안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는 것, 주변에 있는 물건으로 들것을 만드는 법, 유독가스를 소량 들이켰을 때의 대처 방법, 지하철에 구비되어 있는 방독면, 매번 잠겨있는 옥상 등이 꾸준히 관객에게 살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영화에서 명대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를, 관객은 잊지 못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어느 한순간도 이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피 요령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 속에서 1분 1초가 급박하게 움직이기에, 관객은 끝없이 긴장하고 영화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적절한 템포를 위해 엑시트가 관객을 이완시키는 방법은 웃음이다. 영화 내내 웃음 포인트와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잘 그려낸다.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이 무엇 하나 불편하지 않다는 것도 대단했다. 혐오적인 면이 없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감독의 인터뷰에서 회자되듯이 엑시트의 중간에는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 나온다. 보습학원에 갇혀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여줄 때다. 이때 화면을 멀리서만 잡는 것은 분명한 감독의 의도였다.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이 최대한 덜 아프도록 설정한 장치였다는 점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또 하나 이 장면의 좋았던 점은 용남과 의주가 아이들에게 '가만히 구조를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 역시 분명한 감독의 의도였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구출되기 위한 출구를 제시한다. 영화에서 손꼽을 만큼 좋았던 부분이었다.
SNS로 확인하는 구조 상황, 재난 상황을 알리는 재난문자, 두 사람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인터넷 방송의 시청자들 역시 영화에 현실성을 더해준다. 사소한 요소들 하나하나가 부가될 때마다 영화의 짜임성은 점점 높아진다.
또한 언론에 대한 비판 역시 잊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오로지 좀 더 이목을 집중받기 위해 움직이는 현대 사회의 언론. 엑시트는 재난 상황의 매뉴얼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까지 분명하게 언급한다.
사소하지만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유성애적인 요소가 등장하지만 결코 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용남이 의주를 짝사랑하고, 마지막에 의주도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치지만, 재난 상황 속에서는 그런 언급을 일절 삭제한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그들의 겪는 상황만을 주로 잡는다.
엑시트는 전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적절히 쳐내고, 잘라낼 줄 안다. 그래서 좋았다. 이 영화에는 재난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것들이 없다.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하지도 않고,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는 신파도 없으며, 한국의 문화매체가 사랑해 마지않는 로맨스도 없다. 그것들을 지우고 이 영화는 모든 것을 챙겼다.
엑시트는 가장 완벽한 재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