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스물 한 살, 다시 한 번 대학교 새내기가 되어 엠티를 갔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식탁에 둘러앉아 지나가면 어리다고 평가하게 될 말들을 진지하게 나누었던 밤. 그날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했고, 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나를 죽이는 일이라고. 사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나를 죽여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SNS 상에서 거진 유행어처럼 돌고 있는 문장을 마주쳤다. 사랑은 자해다. 어디서 시작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정의했던 사랑과 참 유사해서, 그리고 내가 여전히 저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무색해서 조금 웃었다. 그래, 사랑은 자해지. 타인을 위해 나를 죽게 만드는 마음은 참 독한 거였지.
※ 다음 문단부터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 예정이신 분은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헤어질 결심>은 어쩌면 ‘사랑은 자해다’라는 문장을 박찬욱 식으로 풀어낸 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소용돌이 치는 바다 위에 덩그라니 남겨져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알지 못해 가만히 앉아있었다. 영화 어땠어, 라는 질문을 받고도 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좋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 마음을 그저 ‘좋았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묘해. 그렇게 대답해놓고도 적절하지 않은 답인 것 같았다. 좋았던 대사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는 좀 더 많은 걸 답할 수 있었다. 질문을 던진 친구가 연락을 확인하지 않는 동안 혼자서 조금씩, 조금씩, 생각나는 대사들을 덧붙였다. 그러자 영화 어땠어에 대한 내 대답이 무엇이어야 했는지 보였다. 한 번 더 보고 싶어. 가장 분명한 감상이었다.
내 귀에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는 대사가 들렸던 순간부터 사실 예견된 결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기 전 저 대사만 보았을 때 내가 예상했던 톤이나 상황과는 너무 달라서. 이 대사는 너무도 가볍고 덤덤하게 휙 스쳐가버린다. 그러나 힘 주어 쓴 문장이구나를 모를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라서, 듣는 순간 아 이 영화는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번지겠구나 예감해버리고 말 테니까. 그리고 이 슬픔은 영화 속에서 곧 사랑으로 뒤바뀐다. 당신의 사랑이 끝날 때 자신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송서래의 입에서 직접, 그것은 사랑으로 명명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의도적으로 ‘헉, 서래가 해준을 죽이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 남편의 살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보여주는 장면의 교차편집에서는 서래가 해준을 밀 것만 같고, 둘이서 함께 호미산을 올랐을 때 서래가 말하는 ‘안녕, 할아버지.’ ‘안녕, 엄마.’ 뒤에는 금방이라도 ‘안녕, 해준씨’가 따라붙을 것만 같다. 뼛가루를 뿌리는 해준을 향해 걸어가는 서래의 시선은 불안정하고, 해준은 조금만 밀어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에 서 있으니까. 그러나 서래는, 그러한 해준의 뒷모습을 품에 끌어안는다. 그 포옹은 폭력의 방향을 해준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로 돌려놓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폭력과 사랑은 정말 양극단에 놓여있는 것 같은 단어인데도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가스라이팅이라거나 데이트 폭력 같은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다. 해준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 스마트폰은 다름아닌 ‘살인 사건의 결정적 증거’이다. 해준을 해준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러나 해준은 그것을 자신의 손에 쥐고 어떻게든 무너진 탑을 다시 쌓으려하지 않는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서래의 집을 떠나며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던지라고 선언함으로써 해준은 스스로에게 가장 큰 폭력을 휘두른다. 서래는 붕괴라는 단어의 정의를 찾아 읽으며 비로소 해준이 자신에게 내어준 마음의 크기를 확인한다. 마침내,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다.
사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그 마음에는 ‘자각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든 뒤에야 아, 나의 색이 변했구나 깨닫는 것처럼. 서래는 영화 내내 자신에게 솔직하다. 해준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바람에 처음에는 서래의 속내를 도통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사실 정보의 비대칭에서 발생한 문제에 불과하다. 적어도 서래는,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알고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꼿꼿하게 바라보고 있다. 남편을 죽이고 싶었고,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해준을 다시 보고 싶었고,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었으며, 해준에게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사건으로 남고 싶었으므로. 결국 속절없이 빠져들어 영문 모르고 휘둘린 것은 해준이 되어버리는 것이 이 영화의 지독한 지점이다.
<헤어질 결심> 속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일상성과 언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잠복을 하며 서래를 지켜보는 해준이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장면들에서 종종 해준의 숨소리가 깔리는데, 이로 인해 전혀 성적이지 않은 장면에 성적인 긴장감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불륜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감정이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또 하나, 서래가 중국인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서래의 한국어는 계속해서 독특한 억양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아가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에는 그녀의 모국어(중국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때, 서래는 번역기를 사용하는데 이 지점이 바로 관객에게나 해준에게나 시간적 틈을 발생시킨다. 서래의 억양, 표정, 제스쳐들을 보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하다가, 뒤이어 밀려들어오는 의미를 받아들이며 앞서 보았던 비언어적 표현들과 맞춰나가는 그 과정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서래가 해준에게 중국어로 말해달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묘하게, 이 관계의 중점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엿봐버린 기분마저 느껴진다.
그들의 결말은 지독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의 공방은 결국 서래의 승리로 끝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의자를 조사하는 형사인 해준은, 서래에게 사비로 비싼 초밥 세트를 사주었던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그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영영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서래는 영영 해준의 공간 한 켠을 차지한 채로 잠들지 못하는 그의 모든 밤에 머무를 테니까.
서래는 해준에게 바다에서 찾아온 휴대폰을 더 깊은 곳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해준의 그 말을 그녀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아는 관객들은, 그녀의 그 말이 서툴게 전달되는 응답임을 안다.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준 역시,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서 서래가 자신의 어떤 말을 사랑한다는 말이라고 표현했는지 알게 된 순간 곧장 알아챘을 것이다. 서래가 자신에게 건넨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서로에게 단일한 존재로 남고야 만다.
영화에서 가장 깊숙하게 남은 대사로 내가 꼽은 것은 결국 한 단어였다. ‘마침내’. 사실 우리가 일상 생활의 대화 중에 마침내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서래가 저 단어를 말했을 때 우리는 낯섦을 느끼고, 저 단어가 한 번 한 번 발음될 때마다 이 영화에 물들어 간다. 마침내라는 단어는, 무언가 기다려온 것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 모든 순간들이, 이들의 모든 일들이 필연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입 안에서 반복할 때마다 어쩐지 달라지는 그 단어의 느낌이 영화를 계속해서 곱씹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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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서 헤어지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연인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이별하는 이유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이어온 나의 신념이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헤어진다. 어찌되었든 그 사람의 곁에 계속 남을 만큼 상대를 사랑하지는 않게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서 비롯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 결심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은 그 어느 증거보다도 명확하게 사랑을 증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