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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루 Nov 24. 2021

당신이 나를 찾겠다고요?

영화 <디어 에반 핸슨> 스토리 리뷰

  ※ 해당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영화 <디어 에반 핸슨> 포스터

  "Dear Evan Hansen"


  친애하는 에반 핸슨에게.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편지를 쓰는 사람 역시 에반 핸슨이다. '스스로에게 편지 쓰기'는 불안 장애 및 우울증 등을 앓고 있는 에반 핸슨이 심리 상담가에게 권유받은 치료법의 일환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뺏어간 코너가 자살하면서 그의 유가족들이 그 편지가 코너의 유서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첫 장면에서 약을 삼키는 에반을 보면서 불안과 함께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다. 정신질환에 대해 당사자성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신질환에 관한 극을 보다보면 트리거가 눌리는 장면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니까. 영화를 보다가 놀랄까봐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질환자에 대해 말하는 극이 더 많이 나오기를 소망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좋은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 긍정적인 평을 내릴 수가 없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에 영화의 평을 찾아보니, 노래는 좋지만 스토리가 별로라고 평하는 분들이 제법 있었다. 주로 문제 삼아지는 부분은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이 불가하다는 지점이었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거짓말을 보며 관객들이 '대체 왜 저 거짓말을 멈추치 않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관객이 주인공에 몰입하지 못하면 그때부터 극은 혼자서 흘러갈 뿐이니까. 

  그러나 내가 가장 불쾌했던 지점은 '정신질환'을 다루는 이 영화의 태도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신질환자는 총 세 명이다. 불안장애 및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나오는 에반 핸슨, 렉사프로를 복용한다고 말하는 (우울증으로 추청) 알라나, 그리고 분노 조절 장애 및 여타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었을 코너.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의 절반 가량을 정신질환자로 설정해두었지만, 정작 이 영화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충분히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알라나의 '코너 프로젝트'

  솔직히 말해 알라나가 코너의 추모식을 열 때부터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팔찌를 만들고, 함께해달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알라나의 태도가 나에게 큰 거부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았을 뿐 교사나 유족들에게 동의를 구했겠지,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코너의 유가족인 조이가 뻔히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대체 왜, 친한 친구조차 아니었던 알라나가 추모식을 여는 것일까. 게다가 코너가 학교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다들 알고 있으면서, 가해자와 방관자가 뒤섞인 아이들에게 추모하자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라나가 '코너 프로젝트'라는 종이를 내밀었을 때 나는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친밀한 관계였어도 심사숙고해야할 고인의 이름을, 자신의 맘대로 프로젝트에 집어 넣어 사용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알라나가 말했던 대로 '정신질환은 누구나 갖고 있을 수 있고, 그럼에도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자 했다면 굳이 코너의 이름을 넣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유족들에게 허락을 받더라도, 그것은 코너의 허락이 아니다. 그런데 알라나는 심지어 그에 대한 허락을 직접 구하러 간 것도 아니고, 에반에게 말을 전달하게끔 부탁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코너의 가족들이 여기서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이 (아무리 긍정적인 의도의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이용되는 것을 어떻게 고마워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 중의 그 누구도 코너가 왜 죽었는지, 무엇을 고민하다 죽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심지어 그렇게 성사된 코너 프로젝트의 활동은 '코너 추모 농장 만들기'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물음표가 백 개로 증식했다. 코너 추모 농장을 만드는 것이 대체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중간에 나오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 농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는 말도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이 목적이 '우리 곁의 수많은 코너를 돕자'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면 프로젝트는 더 빨리 성사됐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유서를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무례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결국, 추모 농장 만들기가 코너를 추모하자는 목적마저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 이 영화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 알라나는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아서,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크리피한 장면이 있다. 바로 추모식 직후의 부분들이다. 에반은 추모식에서 자신과 코너의 우정에 대해 말하며 노래한다. (노래하는 장면이 뮤지컬식의 허용인지 정말 노래한 것인지는 넘어가기로 하자.) 그곳에서 등장하는 가사가 바로 'You will be found.' 이다. 영화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바로 그 문구. '우리가 당신을 찾을게요.' 

코너의 추모식에 서 있는 에반

  헛웃음이 나왔다. 거짓된 우정을 말미암아 부르는 노래가 관객에게 와닿을 수 없다는 부분도 동의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에반이 코너를 추모하기 위해 하는 모든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주인공의 감정적 맥락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불쾌하게 느꼈던 지점은 저 말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에반의 영상을 널리 퍼뜨리고, 사람들이 코너를 추모하기 시작하고, 그것에 유족들이 감동과 위로를 느끼는 장면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영화는 그 장면들을 기괴하게 연출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적인 장면처럼 연출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알지도 못하는 자의 추모 연설을 듣고, 나를 그리워하면서 값싼 추모를 휘갈기는 상황'을 감동적이라고 느끼라니. 내게 그 장면은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코너가 과연 저 상황을 좋아했을까? 살아생전 자신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본 적 없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제와서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썼을 게 분명한 글을 남기는 상황을? 만약에 코너가 살아돌아온다면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진심으로 코너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노력할까? 코너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다지만,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그들 곁에 있는 또 다른 코너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쓸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코너를 위한 추모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는 나를 자랑하는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을 찾겠다'는 말은 그저 허울 좋은 입바른 말에 불과했다. 그들은 아무도 찾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이 영화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알라나와 같이 겉보기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학생들도 정신질환의 당사자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 같고, 나서서 발표도 잘하고, 임원직을 도맡는다거나 하는 학생들 역시 정신질환을 갖고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영화의 결말이 부족하게나마 '코너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이미 죽은 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우리가 전부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사람이 좋아했던 책을 읽고, 만들었던 노래를 듣는 것. 그게 아마 돌이킬 수 없을만큼 큰 거짓말을 한 에반이 코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추모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무척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타인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때는 보다 간단하게 대답한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단편만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타인 역시 나만큼 복잡한 생물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내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섣부른 판단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맞는지 아닌지 답할 수 없는 고인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는, 더더욱. 

  영화 내내 나는 코너가 어떤 사람이었을까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이유는 뭐였을지, 코너가 힘들어했던 지점은 어떤 부분이었을지. (물론 그가 조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사실 자체를 옹호하거나 그에게 정신적인 힘듦이 있었으니 묵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디어 코너 머피가 아니라 디어 에반 핸슨이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략적으로 삭제되었겠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수많은 코너 머피와 에반 핸슨과 알라나 벡의 이야기가 실존하고 있다.

코너와 에반

  그들을 위해 필요한 진짜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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