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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루 Sep 05. 2023

우리는 좀 더 다정해야 해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후기

이 영화를 처음 소개해준 친구의 말은 그랬다. 국세청에서 쿵푸를 하다가 딜도를 든 딸이랑 싸우고 베이글에 맞선다고. 듣고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물었더니 더 자세히 말해줬는데, 그걸 듣고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뭘 본 거야? 그래서 직접 봤다. 놀랍게도 설명해준 말이 다 맞았고, 꼭 보라던 말도 맞았다. 아마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세상의 모든 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는 본질일 테니까.


*이 글에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 예정이신 분께서는 주의해주세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어절이 매 부의 소제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1부의 제목은 Everything, 그리고 1부(사실은 1, 2, 3부의 시작 장면이 모두 같지만)가 시작되는 순간 에블린의 책상을 가득 채운 영수증을 비춰준다. 어쩌면 그것은 에블린에게 ‘모든 것’이니까. 그녀의 삶이 계속해서 쌓아올린 것들을 전부 모아놓은 게 바로 그 영수증들이다.

  하지만 에블린의 영수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세금 처리면에서 문제가 적발되어 국세청으로 소환당하는 게 이 영화의 시작이니까. 에블린은 그 영수증들을 정리해야 하고, 문제가 없음을 증명해야 하며, 결론적으로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를 위해 남편과 딸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이럴 시간 없어.’ ‘지금 정신없이 바빠.’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분명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작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걸까?’


에블린은 과연, 영화의 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


  평행세계의 남편이 찾아와 에블린에게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달아주는 순간 에블린의 삶은 순식간에 뒤집힌다. 영화의 본격적인 스토리 전개도 여기부터 시작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핵심 세계관 중 하나는 멀티버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우주가 있고 그 우주를 ‘버스 점프’라는 과정을 통해 넘나들 수 있다는 설정이다. 어떤 세계의 에블린은 쿵푸 마스터고, 유명한 배우고, 심지어는 손이 핫도그이기까지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핵심인 모녀 관계는 어디서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핫도그 세계엔 조이가 없겠지만…….)



  가장 못난 에블린은 딸인 조이의 성지향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딸의 모습에 사사건건 불만을 갖고 지적한다. 가장 잘난 에블린은 조이를 극단적으로 훈련시키다가 딸의 정신을 조각조각낸다. 표면적으로는 달라보일지언정 두 우주에서, 다시말해 그 어떤 우주에서도 둘의 관계는 유사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빌런으로 자리하는 알파버스의 조이 ‘조부 투파키’는 사실 조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의 차이점은 딱 하나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우주의 에블린과 자신을 보았고, 엄마가 자신을 영영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그로 인해 조부 투파키는 끝없이 공허해졌다는 것.


  그래서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을 만든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올린 베이글. 중간에 ‘빛과 소금’이 언급된 것을 보면 아마 다양한 은유가 더 포함되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베이글이 갖는 가장 중요한 비유는 바로 눈이다. 베이글 위로 눈동자를 오버랩시키는 장면을 통해 더 없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베이글이 굳이 까만 베이글이어야 했던 이유도 아마, 눈동자의 색과 반전되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글


  소통을 포기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없애기를 선택한 조부 투파키가 만든 것이 베이글이라면, 아내와 어떻게든 소통하고 싶어하고 계속해서 대화하고자 하는 남편 웨이먼드가 여기저기 붙이고 다니는 건 장난감 눈알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죽고 싶은 순간에서 구해내는 것은, 공허하디 공허한 삶을 계속 이어가고자 버티게 만드는 것은, ‘다정함’이라는 게 이 영화의 주장인 것이다.


  이 눈알은 버스점프의 필수요소인 ‘말도 안 되는 행동’과도 연결된다. 버스점프를 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내가 가장 하지 않을 법한, 말하자면 개연성이 없는 짓을 저질러야 한다. 립밤을 먹는다든가, 국세청 직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든가, 손가락 사이를 연속으로 4번 종이에 베여야 한다든가.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 가장 개연성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순간이 언제인지 이미 알고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해질 때. 그 때마다 우리는 이 공허한 세상을 더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최후의 싸움에서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당신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말하며 다정함으로 무장한다. 총알이 눈알로 뿅! 변하는 장면은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는 설명이다. 총과 주먹이 아니라, 사랑과 다정으로 걸어나가는 에블린의 모습은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덕분에 에블린은 베이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조부 투파키를 마침내 붙잡을 수 있다. 다정함은 정말로, 가장 강력한 생존 전략이니까.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이 다음에 나온다.


  마침내 에블린이 자신이 조이를 이해한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 그리하여 자신의 아버지에게 베키가 조이의 여자친구라고 당당히 소개한 그 순간, 조이는 자리에서 뛰쳐나간다. 아마 에블린은, 또 다른 어머니들은 이 지점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뭐야, 자기 여자친구를 그냥 친구라고 소개해서 상처받았던 거 아니었어?’하고. 엄마와 딸의 타이밍은 항상 이렇게 어긋난다. 엄마는 꼭 한 박자씩 늦기 마련이고, 안타깝게도 딸들은 그 한 박자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에블린이 끝까지 조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판타지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에블린은 조이의 많은 부분을 이해했지만) 그래서 울며 차에 타려는 조이를 붙잡아놓고 한다는 말이 ‘너 살쪘어’ ‘먼저 전화 한 통 안 해’ 같은 서운한 지점들의 토로라는 게 좋았다. 어차피 우리는 그 어떤 타인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내가 너에게 다정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일이다. 저 서운함의 끝에서 에블린이 끝내 내뱉는 말이 ‘그래도 나는 네 곁에 있겠다’는 선언이듯이.


  에필로그나 다름 없는 지점에서 에블린은 베키에게도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조이와 베키는 그녀의 말이 여전히 불편하겠지만, 서로를 향한 키스 한 번으로 키득대며 그 말을 흘려보낸다. 에블린의 말이 베키를 딸의 애인으로 인정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는 걸, 두 사람은 이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스러운 장면은 아닌 척 하며 딸의 성지향성을 인정하지 않던 에블린이 베키를 조이의 여자친구라고 소개시킨 부분이었는데… 에블린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는 무려 손가락이 핫도그여야 하는 세계이고 그 세계에 다녀와서야 조이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는 점에서 개연성 점수를 주기로 했다…….)


  결말로 가면 빨래방에 얽힌 세금 처리 문제는 결국 해결된다. 에블린은 더 이상 가라오케 영수증에 그려진 까만 원으로 인해 마음을 다치지 않아도 된다. 영화의 첫 장면이 동그란 거울 속에서 사이좋게 노래하는 세 사람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어째서 이 이야기의 시작이 가라오케 기계로부터 비롯된 문제여야 했는지를 알 법 하다. 에블린은 이제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게 다정을 건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다들 또 한 명의 에블린이니까.


We are all small&stupid


도리가 있나, 뭐.

그저 조금 더 다정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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