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무엇에 도전하는가
정희진 작가님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정독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정독하기보다는 빠르게 읽어내리는 편인데, 이 책은 항상 스터디를 위해 읽다 보니 꼼꼼히 보게 된다. 처음에는 어렵고 새롭기만 했던 책이 이제는 아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너무 느리고, 몇 년 전과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스터디가 이전과 달랐던 점은,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이다. 한 명은 페미니즘에 어느 정도 관심만 있는(스스로 그렇게 표현했다)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둘 모두 이 책에 대한 주된 감상이 '지금껏 살아온 세계가 깨지는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건 다시 말해 지금껏 남성의 시각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뜻이다. 페미니즘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남성의 시각으로 세계를 본다. 적어도 그 일에 익숙하다. 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언어를 쓰고, 남성들을 기본형으로 둔다. 사람을 칭하는 남성형 명사에는 사람 인(人)자를 쓰지만 여성형 명사에는 계집 녀(女)자를 쓴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말하듯이 여성형 명사에 '인'자가 붙는 말은 미망인(남편이 죽은 여인을 이르는 말) 뿐이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젠더의 전복이다. '섹슈얼리티'와 '섹스'와 '젠더'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섹슈얼리티는 성적인 것을 총칭하는 단어이고, 섹스는 신체적인 성별(지정 성별)을 이르는 단어이며, 젠더는 사회적인 성별을 이르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젠더란 '만들어진 성별'이다. 보부아르의 유명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곧 젠더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성성/남성성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라서 조신한 게 아니라, 여성에게 조신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조신해졌다는 의미다.
젠더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흔히 여성과 남성은 다르게 태어난다고 착각하는데, 성별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시스템일 뿐이다. 당연히 완벽하지 못하다. 일례로 여성은 여성 생식기를 갖고 XX염색체를 보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여성 생식기와 XY 염색체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 있고, 여성 생식기와 남성 생식기를 모두 보유하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여성을 여성으로, 남성을 남성으로 규정해야 할까.
페미니즘의 답은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할 줄 알면 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지 않듯이, 상대방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