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 씀] 남은 이야기를 가지고 왔어.

5월의 말할거리, 나의 우울

by 아름

[돌멩 씀] 5월 1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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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변덕 부리는 날씨에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는 중인 돌멩이야.


주말은 잘 보냈어? 회사는 다니지 않지만 월요병은 고질병인 모양이야.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그렇지만 너에게 보낼 편지는 꼭 쓰고 말겠다는 의지로 씩씩하게 (반쯤 감은 눈으로) 지면 앞에 앉았어.


사실 지난주에 보낸 편지는 발송 버튼을 누르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이었어. 무겁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너무 무거운 문장만 담은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우려와 달리 내용이 너무 좋았다는 친구들이 많더라구. 무겁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으로 낸 용기가 닿은 것 같아서 얼마나 뭉클하고 기뻤는지 몰라.


보내준 용기로 오늘의 이야기도 잘 써볼게. 지난번 편지에서 예고했듯이 오늘은 Y 선생님의 처방(이랄까 제안이랄까...)을 받고 난 뒤에 나누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동생과의 대화를 들려줄게. 초반의 대화는 조금 감정 소모가 있을 수 있어. 피로하다면 처음 대화는 넘겨주어도 좋아.


대개 동생과 대화할 때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 나오면 우린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어. 그럼 분위기는 불편해지고, 서로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지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져. 깊어지는 골은 잡을 수 없어져서 결국 며칠간 함께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어색해지고, 분위기가 풀리기까지 적어도 사나흘이 걸렸어.


Y 선생님이 감정을 던져두어도 괜찮다고, 해결이 아니라 내 감정의 해소를 위해 그래도 된다는 말씀을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고 공방으로 돌아온 뒤의 대화야. 너도 알다시피 난 캔들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 간혹 동생이 운영하는 네일샵에서 캔들을 보시고 주문을 주는 손님들이 있거든. 이날도 새 주문이 들어왔었어. 동생이 내게 주문 건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나눈 대화는 이랬어.



[피로도 높음 주의]

(멩:돌멩 동:동생)

동 : 언니, 티라이트 캔들 주문 들어왔어. 향 네 가지 고르셔서 4구 가격으로 판매했어.

멩 : 아 그래? 근데 4구 가격 할인은 같은 향 4구일 때만 할인되는 가격이야. 다른 향일 때는 손품이 많이 들어서 할인이 안 되거든. 이번엔 결제했으니 그냥 그대로 드리고, 다음에는 그렇게 안내해 줘.

동 : 그래? 난 몰랐지. 근데 이미 그렇게 판매해서 그 뒤에 가격 올려 부르는 건 좀 그럴 거 같은데.

멩 : 향 교차 안 된다고 가격표 아래에 적어뒀었어.

동 : 설명 안 해줬잖아. 그리고 손품 많이 드는 건 손님들은 모르니까.


사실 이쯤에서 난 ‘그래, 그럼.’ 하고 자리를 뜨는 타입이야. 대화에서 내가 얻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둬버리거든. 근데 속에 들어차는 답답함과 예민함이 느껴지더니 Y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지. 그래서 그냥 내 생각을 그대로 얘기했어. 대화에 진전이 있든 없든, 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멩 : 손품 많이 들어서 그렇다는 건 손님한테 설명 안 해도 돼. 그리고 원래 가격을 안내해 드리는 건데 그게 왜 좀 그래?


동생은 날 빤히 보더니 자리를 떴어. 벌써 냉기가 느껴지지? 나도 동생의 말투에 기분이 상한 상태였고, 덩달아 내 말투도 싸늘해졌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대화가 순식간에 벌어졌어. 내 기분을 설명하는 게 최고지만, 거기까지 말하지 못했어도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조금 낫긴 했어. 하지만 감정은 그대로 고여있어서 한숨으로 조금씩 뱉어내고 있었지.

[피로도 구간 종료]


조용히(하지만 괜히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캔들을 만들고 있는데 동생이 작업실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뜨러 와서는 묻더라구.


동 : 기분이 안 좋아?


혼자 조잘거리며 작업하는 편인데 이날은 조용하게 작업하니 기분이 가라앉은 게 더 티가 났던 모양이야. 사실 이렇게 물어도 평소라면 아니라고 답하고 혼자 삭이고 말았을 텐데, 속으로 ‘이건 기회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멩 : 기분이 좋지는 않네.

동 : 왜?

멩 :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서. 충분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문제인데 네가 너무 따지듯이 말하니까.

동 : 아…

멩 : 생각이 많은데, 그래도 괜찮아.


어색해지는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결국 또 괜찮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짓고 말았어. 하지만 따라온 동생의 답은 의외였어.


동 : 미안해.


조심조심 미안하다는 동생의 모습에서 아장아장 걷던 꼬맹이 시절의 동생의 모습이 보였어. 언제 이만큼 컸지, 싶은 마음과 찡한 마음이 엉켜서 뭉클해지고 말았어.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화해 비슷한 걸 해보았어. 이후로 우린 암묵적으로 서로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는 말을 둥글려 안부를 묻고, 기분이 좋을 때에는 누구보다 신나게 웃으며 지내. 감정이 복잡할 때는 내 작은방 침대에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가까워졌대도 여전히 우리는 내가 아닌 사람들이라 작은 생채기를 내기도 해.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내게 가족이 있다는 걸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요즘 내가 ‘관계’라는 이름 아래에 둔 많은 깨달음 중에 가장 또렷하게 새겨놓은 말이 있어.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 타인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타인이 말하지 않은 것을 내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말하지 않은 것은 누구든 모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만, 또 그래서 대화가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해. 어떤 부정의 마음이 솟을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제법 도움이 되더라구. 이 말을 되뇌고 나면 타인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지 않게 되어서 마음이 가벼워져.


이 생각을 떠올리고 난 이후에 내가 하는 일은 모든 기대는 내려두고 내가 해야 할 말을 홀로 정리하고, 그 말을 상대에게 단조로운 온도로 전하는 것이 전부야. 말하자면 자물쇠가 될 수도, 열쇠가 될 수도 있는 걸 상대 앞에 놓아두는 거지. 다음 단계는 열쇠나 자물쇠를 든 상대가 내가 던져둔 것들을 받을 때 시작하면 돼. 홀로 해결할 수 있는 관계는 없으니 말이야.


너의 언덕은 어떤 모양일까? 대부분 관계로 만들어진 언덕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을 쓰게 되는 모든 관계는 유익과 유해를 동시에 줄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수많은 마음을 쓰며 어떤 곳을 향해가는 것 같아. (나도 아직 종착지를 알지 못해서 그곳이 어딘지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정신과 진료는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관계를 유연하고 따스하게 이어나가는 모든 정답을 알지는 못해. 하지만 Y 선생님의 ‘감정을 던져두어도 된다’는 말은 나와 관계 모두에게 유용한 답안인 것 같아.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돼. 그저 우리를 위해 감정을 털어두자.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어.


다음 편지를 마지막으로 5월 뉴스레터가 마무리될 예정이야. 마지막 편지에는 친구들이 4월부터 지금까지 주었던 질문에 답하는 코너로 꾸려보려구. 질문을 준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답장을 주고 싶었는데, 이 지면을 빌려 대답해 볼까 해.


5월 한 달도 꾸준히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워. 비록 우울을 전하는 편지를 썼지만, 내 편지를 읽어간 시간들이 모여 너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었기를 바랄게.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5월의 마지막 일주일 완주를 위해 숨을 가다듬어보자. 수요일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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