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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Apr 14. 2022

프리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어느 새 한 달이 되었다.

프리즘,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삶. 어디에서 본 들 정답이 있을까. 나는 나일 뿐인데. 다가오는 결말이 두렵다. 때로는 컨트롤 하지 못 하는 내 자신이 무섭다.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나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제일 무섭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고, 떠오르고 있는 모든 망상과 생각들을 휘어잡을 수 없다. 내버려 둘순 있지만, 행동하는 순간, 옮기는 순간이 무서운 것이다. 반면 사회적으로 옳은 일들이나 선한 일이라고 부르는 일들도 행동으로 잘 옮기기 때문에, 양면의 날처럼 다가온다.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건 내게 그런 일이다.

 내 안의 사랑이 있냐고 정말로 물어본다면, 모르겠다. 정말 있을까. 스스로와 대면하다보면 정말 무섭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소설 속에 여자, 그녀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나의 분신이고, 내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무서워서 글쓰다가 덮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이제야 겨우 내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데, 또, 나는, 어느 순간 뒤에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글을 쓴다. 결국 돌고 돌아 그것은 모두 나인데, 뭐 그렇게 못잡아먹어 안달인지 우습기도 하고, 예전같지 않으니까, 어디 한 번, 도전해봐라하고, 글을 쓴다. 결국 내 삶의 남는 건 글 밖에 없을 거고, 평생을 글을 쓰다가 죽을 것이니, 이런 사람도 살았었고, 어떤 고통에 괴로워했고, 공존해서 살아가는 어떤 방법을 찾았겠거니, 하는, 일종의 흔적들을 남긴다.


 프리즘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안쪽은 보여줄 수 없다. 밖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고 만족한다면 그걸로 그만이지. 굳이 내 안쪽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썩어들어가는 살점들을 보여줘서 뭘할까. 썩어서 없어진다면 좋으련만, 고깃덩어리들이 한 움큼씩 엉켜서 유착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처음엔 싫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조금이라도 꺼내서 밖으로 버리려고 노력은 한다.

 안을 감추기 위해 내겐 빛이 필요하고, 그 빛을 반사해서, 진짜 모습을 감추고,그 빛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어디선가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반사할 수 있고, 감추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군가를 구원할 빛이 내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형태는 갖춘 채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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