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ED
23년 5월 31일 새벽 6시 41분, 재난 문자가 울렸다.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시 특별시] 문자를 보자마자, 창 밖을 보고 있는 내 고양이를 끌어내렸다. 네이버에서 뉴스를 검색해 봤지만, 먹통이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은 5층이고 대피소는 없다. 가까운 지하철이나 학교로 가야 할 텐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미사일이나 핵이라면 벌써 터지고 남을 시간이었다. 고양이들 네 마리와 함께 도망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고양이들을 내 옆에 두고 다 같이 죽어야지,라고 마음먹었다. 캐리어에 싸들고 간다 한들 네 마리를 어떻게 돌볼 것이며, 게다가 고양이들이 죽고 나만 산다면 살아남은 죄책감에 휩싸여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이다. 언제나 죽네 사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땐 역시 살고 싶다. 예기치 못한 일로 죽고 싶지 않다. 죽을걸라면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죽고 싶다. 앞으로 육 개월 정도 살 수 있다던가, 아니면 오늘내일한다던가. 그러면 온전한 정신으로 삶을 정리하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 우리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이 연약해서 어떤 사소한 일에도 꺼질 수 있다.
출근하는 길에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문득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겨 내 앞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난다면 난 아이를 살리고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아이들에 비하면 살만큼 산 인생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책임져야 할 일도 있지만 이제 막 피어나는 아이들의 남은 시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게 매일 출근길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생각한다. 정말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조심하며 살면서 집에 돌아와 곱씹으면 역시 죽고 싶다고 읊조린다. 죽고 싶다는 말은 곧 살고 싶다. 제대로 살고 싶다,는 말이다. 바람 앞에 속절없이 꺼지는 등불이지만, 바람을 막아주고 누군가 다시 불을 붙여준다면 환하게 빛날 수 있는 불. 무너지고 실패하고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