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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Sep 02. 2023

정신병과 정신병자와 정상인과 예민함의 기준


 뭘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있다. 나의 청각적인 예민함이 남들의 배, 아니 몇 배인지는 따질 수 없겠지. 예를 들어볼까. 잠들기 전에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 강의시간에 말을 더듬는 학생의 소리, 떠들지 않고 타자로 매일 떠드는 친구들, 공연장에서 흔드는 부채 소리, 음료를 다 마시고 빨대로 빨아먹는 소리, 코 고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잠들려고 하는 데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 또 뭐가 있을까. 지금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찾아오는 정신병을 가장한 정상인, 정신병을 가진 정상인, 정신병자, 그저 예민할 뿐인 사람. 이 모든 걸 구분할 수 없지만 당신이 무엇이든 날 포함해서 타인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사람은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많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까이하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싫은 사람도 있을 거고, 아예 내가 싫은 사람도 있을 거고.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가짜와 진짜를 내가 가릴 수 있을까? 나에게 와닿느냐, 와닿지 않느냐로만 판단할 수 있다. 애초에 '진짜', '가짜'가 없으니까. 구별할 수가 없는 거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느낀 건 성별, 나이, 연령대는 아무 상관 없다. 나랑 즐겁게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것,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사람'이 중요한 거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실제로 정신병을 가지고 있든 정신병자이든 정상인이든 상관없었다. 나 또한 그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니까. 다만 확실한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과거의 죽을 만큼 아팠던 사람들이랑은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슬픔이나 분위기가 있었다. 그 사람들 역시 나에게서 그런 걸 느꼈겠지만 실제로 나는 죽을 만큼 힘든 삶을 살진 않았다. 정신 상태가 너덜너덜했을 뿐이지. 그래도 여전히 살아갈 힘은 있으니까.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글이라 아는 데 나랑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나, 혹은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이 가끔 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댓글로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의외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구나. 내가 이만큼, 여기까지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계속해서 일기를 쓰는 것, 생각을 정리하는 것, 계획을 하는 것, 그리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나라고 느끼지 못하면 더 죽고 싶으니까, 나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쓴다. 어제도, 오늘도 현실에서의 나를 잡아주기 위해 진로상담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울기도 했다. 어떤 게 나인지 아직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해서 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학 잡지 릿터를 읽는 데 인터뷰에 코맥 매카시가 나왔다. 그리고 표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체였다. 코맥 매카시가 좋아하는 작가는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인데 나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난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가.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쓰고 싶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점점 알아가고 있는 올해다. 정신건강의학과는 다음 주로 예약이 되어있고, 이제 와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가봐야 하나 싶기도 하고 정신병이든 무엇이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나를 속이면 어떤가. 살아남기 위한 어떤 투쟁의 일환이겠지. 병도 오래 가지고 있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나아지길 바라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나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리고 코맥 매카시는 이렇게 말했다.



유혈이 없는 삶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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