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Play, Love
푸껫 남쪽 끝에 자리한 카타비치.
푸껫엔 저마다의 얼굴을 지닌 해변들이 있다. 빠통이 젊음의 숨결로 거칠게 달린다면, 카론과 카타는 한 박자 쉬어가는 숨결 같은 곳이다. 조용히 바다를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
그날, 햇살은 구름 한 점 없이 쏟아졌고, 우리는 카오락에서 못 다 한 해변의 여운을 채우기 위해 아침부터 바다로 향했다.
모래를 처음 만난 아이는 한참을 발바닥으로 감촉을 느꼈다. 모래 위로 발도장을 콩콩 찍으며, 모래알의 부드러움에 깔깔 웃는다. 입에 살짝 닿은 바닷물의 짠맛에 얼굴을 구기다가, 얕은 바닷물 속에 몸을 맡기고는 밀려오는 파도에 소리 지르며 금세 적응해버렸다.
나는 사방으로 튀는 아이를 쫓느라 분주했고, 아내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따라 아내의 표정에는 작은 평온이 스며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자신만의 호흡을 되찾은 듯한 얼굴.
그 얼굴을 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육아를 외면했는지,
그리고 아내가 얼마나 지쳐 있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햇살이 너무 강해 오래 버티진 못했다.
한 시간쯤 바닷물과 모래를 오가다, 숙소로 돌아와 이번엔 수영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수영 후엔 자연스럽게 배가 고파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포트에 라면을 끓였다. 수영 후 먹는 그 "라면"은 어느 별미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이었다. 뜨거운 국물 한 입에 땀은 더 흘렀지만, 마음만큼은 시원하게 식어 갔다.
배를 채운 뒤엔 자연스럽게 이어진 낮잠.
아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니 며칠 사이 어느새 태국의 작은 꼬마로 변해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볼,
소금기 머금은 머리칼,
모래알이 남아 있는 손톱.
세상 어떤 부와 명예보다도 귀한 것이 내 곁에 있음이 느껴졌다.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왔다.
우리는 라이브 밴드가 있는 해산물 식당으로 향했다. 싱싱한 생선 굽는 냄새와 기타 선율이 뒤섞여 흘렀고, 밴드의 연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 음 하나하나에 담긴 수많은 밤과 땀방울이 느껴졌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천안에서 보냈던 시절, 기타 동호회에 몸을 담았던 날들. 매일같이 연습했지만, 늘지 않는 실력에 한숨 쉬던 밤들. 양손으로 음을 꾹꾹 눌러 리듬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느리고, 더 고독한 싸움이었다. 악기를 배운다는 건 참을성의 끝자락을 붙잡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공연이 잡혔고,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뤄 합주를 준비했다. 합주는 기타를 잘 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셋이 한 곡을 완성하려면, 서로의 호흡과 리듬, 감정까지 공유해야 했다. 작은 실수에도 서로를 감싸주는 시선, 눈빛만으로도 ‘지금 괜찮아?’라고 묻는 마음. 그 시간들은 음악이었고, 동시에 사람을 묶는 끈이었다.
3개월 동안 손끝이 다 헤어질 정도로 연습했던 그 공연.
무대 위에서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남은 건 기술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에서 피어난 우정과 믿음이었다.
식당 한켠에서 연주하는 밴드를 보고 있으니,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이 스쳐갔다. 혼자만의 독주는 자유롭지만 늘 외로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합주는 불완전한 음들마저도 함께 껴안는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여행도 그와 결은 같았다.
완벽한 박자나 정확한 음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어긋난 리듬을 천천히 맞추고, 때로는 함께 흔들리고 웃으며 흘러가는 것. 모난 소리도, 불안한 숨결도 결국은 하나의 곡이 되었다. 그렇게, 불완전함마저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이름의 합주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음악이 잦아들고, 식탁 위 불빛도 희미해질 무렵, 우리는 천천히 일어섰다. 소화를 핑계로, 내일 머물 숙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구경은 언제나 공짜고, 부담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다 발견한 한 숙소.
커다란 강처럼 수영장이 이어져 있고, 객실 문을 열면 바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 검색해보니 1박에 95,000원. 내가 동남아에서 묵었던 수많은 숙소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비쌌다. 하지만, 가격을 넘어서는 기대와 두근거림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숙소를 예약하려 했던 사람처럼.
계획된 듯, 태연하게.
그러나 손가락은 계획이 없었다.
가볍게 떨렸고, 다시 멈췄다.
이 버튼 하나가 우리 여행의 성패를 좌우할 것처럼.
아이의 발소리는 이미 수영장을 달리고 있었다.
아내의 표정은…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히 반짝였다.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아내는 물었다.
"여기 예약할꺼야?"
이럴 땐 안다.
이미 끝났다는 걸.
나는 한숨도 없이 버튼을 눌렀다.
결정은 늘 그렇게 내려진다.
망설임 끝이 아니라, 망설임 도중에.
방에 돌아왔을 땐, 어제 맡겼던 세탁물이 말끔히 정리되어 침대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햇살처럼 뽀송한 옷을 보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
아이와 모래 위를 뛰어놀고,
수영장에서 한껏 물을 튀기며 웃고,
음식과 음악에 취하고,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나눈 수많은 미소들.
그 모든 순간이 결국은 '가족'이라는 한 단어로 모여 있었다.
‘놀고, 먹고, 사랑한 하루.’
참, 그 말 그대로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