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한 빨리 어디든
용기 내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듣든 상관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였다. 그리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조건은 단순했다. 직항, 가능한 한 빠르게. 어디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떠나는’ 그 자체였다.
검색 조건에 걸린 건 오후 5시 30분, 인천발 방콕행 제주항공이었다. 예약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정말 이 비행기를 타도 괜찮을까?”
설렘보다 먼저 다가온 건 두려움이었다. 여행이란, 원래 그런 감정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떠니는것을 주저하는 마음은 내안의 모든 불안을 끌어냈다.
2006년, 제주항공의 부산 국내선 첫 취항 날이 떠올랐다. 서울–부산 노선. 그날 다른 항공사들은 기상 악화로 운항을 취소했다. 하지만 제주항공은 현장 발권을 진행했고, 직원은 말했다. “대형 항공사들이 더 민감하게 대응할 뿐입니다.” 나는 중요한 일정 탓에 탑승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김해공항 상공을 수차례 돌며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 결국 회항. 그날이 첫 취항이라 날씨를 무시하고 무리해서 띄운 것이었다. 비행기 안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찼다. 생명에 위험을 맞닥뜨린 승객들은 울고, 승무원들도 동요했다. 그리고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돌아온 안내는 단 하나였다. “기상 악화에 따른 회항은 전액 환불됩니다.” 그날 나는 열두 시간을 허비했고, 남은 건 무너진 신뢰뿐이었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기억은 기억일 뿐, 현재는 다를 수도 있다고 믿어 보기로 했다. 항공권을 다시 결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 후 자리에 가려던 길. 바닥에 전선 덮개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직접 바닥 홈에 끼워 넣었다. 불안은 행동이 되어 나타났고, 나는 내 안의 공포를 애써 눌렀다. 이륙 전 승무원들은 승객 머리 위 짐칸을 점검하며 돌아다녔다.
비행기 이륙 5분 후. 내 앞쪽 위 짐칸이 열리며 여행가방들이 승객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비명, 불안, 충격. 내 발밑까지 굴러온 가방들. 아무것도 안심할 수 없었던 그 순간, 나는 다시 과거의 공포 속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후로 6시간 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왜 나는 또 이 비행기를 탔을까’라는 자책만 반복되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최대한 빨리, 침착하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12월의 방콕은 한여름 크리스마스가 시작되는 시간. 불빛으로 장식된 도시, 덥고 축축한 공기,
그 속에 나는 분명히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고, 나는 살아있었다.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일들이 발생한다. 로마에서 디지털카메라를 소매치기당하고, 미국에서 붙인 짐을 며칠씩 못 찾고, 발리에서 트렁크 바퀴가 부서지고 등등. 그런 일이 생기면 신속하게 대안을 찾거나, 아니면 빨리 잊어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거기에 머물지 않는 마음의 태도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고, 잊어야 할 건 빠르게 잊는 것."
스티븐 코비 박사가 말했듯,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것. 그 단순한 통찰이야말로 삶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열쇠다.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그중 상당수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예고 없이 막히는 도로, 낯선 도시에서 겪는 예상 밖의 사건들. 그 모든 것이 나를 시험하고, 때로는 지치게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교통체증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 시간을 피해 일찍 집을 나서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유럽 거리에서 소매치기당한 카메라는 되찾을 수 없지만, 새로운 카메라를 사서 여행의 기억을 다시 담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매 순간, 불가항력과 선택 가능한 일 사이에서 나의 태도를 정하는 과정이다.
이제는 안다. 결국 모든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고, 누구도 내 불안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안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 진짜 여행이고, 진짜 삶이다.
※ [하나] 3. '카오스 로드' 편은 실수로 누락되어 뒤늦게 업로드했습니다. (8편과 9편 사이) 먼저 그 이야기를 읽으시면, 전체 여행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게 따라가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