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빠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휴직, 그리고 육아

by 달빛한줌

한동안 내가 과연 아빠의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사랑스럽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무한한 애정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내 모습은 그러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저녁 6시가 돼서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감안하면 길어봐야 대략 3시간 정도였다. 하루 중 약 10% 남짓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난 그 짧은 시간마저도 어떻게 하면 더 줄일 수 있을까 고민, 아니 연구해왔었다. 퇴근을 할 때면 항상 '오늘은 어떻게 아이들을 빨리 재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생각이었다. 그리 많지도 않은 시간, 아이들과 즐겁게 놀 생각은 고사하고 그런 생각을 해왔다니 참 못나고 나쁜 아빠였다.


그래도 완전 최악의 아빠는 아니었나 보다. 최소한 아이들의 아빠로서 이러면 안 된다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니 말이다. (점수를 매기자면 10점은 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지친 몸을 달래며 쉬고 싶은 나와 지누션의 '션'과 같은 이상적인 아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좋은 아빠는 그저 '션'이기에 할 수 있는 내겐 그저 이상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평일 출근할 때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는 과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까?


주중 과다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였어. 나는 지금 정말 방전되었어. 다음 한 주를 위해 나에게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해~~~~~


이 시대의 아빠(좋은 아빠들 말고, 나와 같은 못난 아빠들)들이 흔히 하는 핑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빠도 그런 핑계를 대곤 하셨었는데, 세월이 흘러도 아빠들의 변명은 진화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회사라는 존재는 가정에서 내가 아빠로서의 역할을 조금은 소홀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물론 지원군이 돼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지만 당시의 나는 혼자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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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1년간의 육아휴직에 돌입했다. 어느덧 7월의 첫날이 됐으니, 휴직한 지 정확히 6개월이 됐다. 이 기간 동안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아마도 아이들과의 관계일 것이다. 정말 많이 친해졌다. 첫째 딸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다. 이제는 제법 커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줄 알게 되었는데,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아빠랑 놀아야 하니 얼른 집으로 오라고 명령을 한다. 둘째 아들은 기상과 함께,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와 안기고 뽀뽀부터 해준다. 이전의 나에게 아이들이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들이다. 두 아이가 유치원에서 하원 하고, 집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아빠~~00 왔어~~ 아빠~~~"부터 외치며 아빠부터 찾는 것이다. 아이들의 아빠에 대한 사랑을 듬뿍 체감하는 요즘이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최대한 피해볼까 생각만 했던 내가 어떻게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가 되었을까? 정답은 질문에 있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피하지 않고,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코로나 덕분에 외출이 어려웠기에 불가항력적인 부분도 조금은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기, 색종이 접기, 인라인 타기, 자전거 타기, 로봇 가지고 놀기, 병원 놀이하기, 레크리에이션 하기, 춤추기, 함께 요리하기 등등등... 아이들 눈높이에서 함께 즐겼다. 이른 아침이든, 늦은 밤이든 시간을 불문하고 말이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내가 우리 동네에서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아빠 랭킹 2위라고 한다. (첫 번째 분은 넘사벽입니다. 정말 '션' 같은 사람이에요) 이전에는 아이들이 나를 부르기만 해도 짜증 샘이 솟구쳤는데,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짜증 낸 적이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쉽지 않다'라고 한다. 6개월 만에 나라는 사람의 성향이 아이들과 잘 노는 체질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은 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매번 출근을 생각해야 했던 내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사라는 존재의 부재는 시간적 여유는 물론,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한 안정감은 고스란히 아이들과 함께할 때 드러났다. 나의 환경이 변했기에 내가 조금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 사랑받는 아빠가 될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실험'이 있다.

신학교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그룹에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발표하도록 준비시켰고, 다른 그룹에는 자유로운 주제로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그룹원들이 발표를 하러 가는 도중에 강도에 습격당한 것처럼 분장한 연기자를 준비하여, 연기자에게 학생들이 지나가면 두 차례 기침하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실험을 진행한 교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발표하는 학생들이 발표 내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위기에 빠진 타인을 더 잘 돕는지를 확인해보려 했던 것이었는데, 실험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발표주제는 실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학생들이 행인을 돕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발표 전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발표 주제와 상관없이 발표 시간까지 긴 여유가 있었던 그룹은 63%가 행인을 도왔으며 적당한 시간이 남은 그룹은 40%가, 하지만 발표 시간에 이미 늦었다고 알려준 그룹은 오직 10%만이 쓰러진 남자를 도왔다.

흔히, 우리는 우리 주변의 많은 현상들을 개인의 의지력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순전히 나의 노력과 열정이 부족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말에 나 역시도 상당히 동의하는 바이지만, 의지를 너무 맹신한 나머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애초에 상황이 다르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어쩌면 나의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다. 부족했던 아빠였던 내가 휴직이라는 환경의 변화를 통해, 조금은 좋은 아빠가 된 것처럼 말이다.


물론 환경을 핑계 삼아 현실 속 나의 부족한 부분을 위로할 생각은 없다. 나 또한 의지, 열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의지력을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며,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자학한다.(많은 이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의 충동과 세상의 욕망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처한 환경이 조작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선 자신을 용서하라.
- 해빗, 웬디 우드 저, 다산북스

내가 의지력이 없어서도, 내가 열정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환경이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다. 난 충분히 잘해오고 있다. 나 자신을 용서해 보자. 오늘 하루 나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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