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한 마디가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한국으로부터 9500억 달러를 투자받기로 했다”는 발언이었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3500억 달러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 충격적인 수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트럼프가 한국 정부의 투자금 3500억 달러에 더해 대한항공의 보잉 항공기 구매 등 민간 기업들의 대미 투자금 6000억 달러까지 자신의 ‘성적표’에 포함시킨 것이다.
지난 10월 29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한 마디가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한국으로부터 9500억 달러를 투자받기로 했다”는 발언이었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3500억 달러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 충격적인 수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트럼프가 한국 정부의 투자금 3500억 달러에 더해 대한항공의 보잉 항공기 구매 등 민간 기업들의 대미 투자금 6000억 달러까지 자신의 ‘성적표’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핵심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한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부유한(wealthy)’ 한국 기업들의 투자로 간주한 6000억 달러를 협상 테이블에서 제대로 활용했을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막대한 민간 투자금이 협상의 ‘지렛대’로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협상 결과 발표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6000억 달러의 민간 기업 투자 내역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정부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만을 공식 발표했을 뿐이다. 이 중 2000억 달러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등 전략산업에, 1500억 달러는 조선업 협력 마스가(MASGA)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반면 트럼프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치부책’에 한국 민간 기업들의 투자금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며 협상 성과를 극대화했다. 한미 양국이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한쪽은 6000억 달러를 ‘무기’로 활용했고 다른 한쪽은 침묵했다. 이 차이가 협상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일본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카이치 일본 총리는 트럼프 방일을 맞아 영빈관 앞에 포드 F-150 픽업 트럭 2대와 미국산 도요타 캠리를 전시했다. “일본이 미국 자동차를 수입하지 않는다”는 트럼프의 불만을 선제적으로 잠재우기 위한 전략이었다. 일본 정부는 도로 및 인프라 점검용으로 F-150 트럭 100대를 구매할 계획까지 발표했다. 트럼프는 “그는 안목이 있다. 아주 멋진 트럭”이라며 화답했다.
중국은 더 적극적이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앞두고 보잉 여객기 주문을 ‘협상 카드’로 꺼내 들었다. 지난 7월, 중국 정부는 각 항공사에 2025년 이후 항공기 구매 및 교체 계획 업데이트를 요청했고, 중국 항공당국 고위 관계자는 브렌든 넬슨 보잉 수석부사장을 직접 만나 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Buy America’를 외치는 트럼프에게 보잉 항공기 구매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었다.
국민의힘은 이번 협상을 ‘6000억 달러짜리 외교 참패’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3500억 달러의 정부 투자에 미국산 에너지 수입 1000억 달러와 민간 기업 투자 1500억 달러를 모두 더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셈법이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딜 규모 자체가 6000억 달러라고 얘기하는 건 과한 측면이 있다”며 “민간 투자의 경우 투자를 예정했던 계획이 담긴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의 투자는 미국에 의해 종용된 게 아니다. 한국에도 도움이 되니 한 것”이라며 “이를 합해 관세 협정으로 인한 부담으로 바라보는 건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6000억 달러를 자신의 협상 성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이 거대한 숫자를 협상 과정에서 얼마나 전략적으로 활용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숫자로 보면 한국의 부담은 확실히 크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오기형 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는 경상수지의 3.5배, 외환보유액의 84.1%, 명목 GDP의 18.7%에 달한다. 반면 일본의 대미 투자는 경상수지의 2.8배, 외환보유액의 41.5%, 명목 GDP의 13.7% 수준이다.
조동근 교수는 “일본과 비교했을 때 GDP 대비 이번 관세 협상에 부담이 있다는 건 맞는 얘기”라며 “일본의 경제 역량으로 볼 때 5000억 달러 정도는 잘 꾸려 나갔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이 요구대로 3500억 달러를 3년 내 집행하려면 연평균 1167억 달러의 외화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외환 당국이 조달 가능한 자금은 연간 150억 달러 내외에 불과하다.
이번 한미 관세협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반도체, 철강 등 양국 간 해결되지 않은 분야가 아직 산적해 있다. 미중 간 관세협상 결과가 목록별로 명문화되어 공개된 것과 달리, 한미 양국의 협상 결과는 이제 막 문서화 과정에 들어갔을 뿐이다.
한국 정부는 여론의 비판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 협상결과를 이끌어낸 것만 해도 성공적”이라는 평가와 “2000억 달러의 현금성 투자를 10년 할부로 나눠 내는 것 외에 도대체 얻은 게 뭐냐”는 비판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후자는 “민간 기업 6000억 달러도 결국 넓게 봐서 같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만큼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6000억 달러를 ‘자신의 승리’로 선언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거대한 숫자를 ‘우리의 무기’로 만들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남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민간 기업들과 더욱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코리아 원팀’의 기세로 국익을 최우선하는 결과를 도출해내길 기대한다. 이번 협상에서 아쉬움으로 남은 6000억 달러가 다음 협상 테이블에서는 강력한 협상 카드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이제 정부의 전략이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