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한국과 미국 간의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정부가 내세운 ‘성과’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실질적인 대안 전략, 즉 ‘플랜B’를 확보하지 못한 채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29일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은 한국이 향후 10년간 미국에 3500억 달러(약 502조원)를 투자하는 대신 상호 관세율을 15%로 유지하고,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표면적으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경제가 감당해야 할 막대한 부담이 숨어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의 아시아 담당 에디터 존 파울은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 약속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플랜B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은 안보는 물론 무역·기술·금융 영역에서 대미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협상 카드가 사실상 없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협상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25% 상호관세라는 칼날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2025년 4월 ‘해방의 날’ 선언 이후 미국은 모든 교역국에 강압적인 관세 정책을 펼쳤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시나리오를 예상하고도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번 협상의 핵심은 3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다. 이 중 2000억 달러는 현금 투자로, 연간 200억 달러씩 10년에 걸쳐 집행된다. 나머지 1500억 달러는 조선업 협력 펀드로 편성됐다. 이는 2025년 한국 제조업 설비투자 규모의 6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한국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투자 이행 여부에 대한 모니터링 메커니즘이다. 양해각서(MOU)에는 한국이 투자를 미이행할 경우 미국이 다시 관세를 높일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반면 투자 집행의 구체적인 결정권은 미국 측에 있어, 한국 기업들이 원하는 시기와 방식으로 투자를 진행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BBC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협상 합의가 불확실성을 크게 줄였다”고 평가했지만,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이번 협상을 ‘을사늑약’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국이 얻은 것은 15%로 낮아진 자동차 관세뿐이지만,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은 막대한 투자금과 비관세장벽 추가 양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이 통상 규범에 따른 ‘주고받기’가 아니라 강압적 딜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미 FTA에 따라 무관세(0%)를 적용받던 한국 상품들이 15%의 관세를 부담하게 된 것은 명백한 후퇴다. 미국은 관세 인상과 대미 투자 확대를 동시에 얻어낸 반면, 한국은 최악을 피했다는 위안만 남았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측은 명확한 플랜B를 가지고 협상에 임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 대법원이 상호관세 정책을 불법으로 판단하더라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뒀다고 밝혔다. 실제로 2025년 5월과 8월 미국 국제무역법원과 연방순회항소법원이 트럼프의 관세 조치를 위법하다고 판결했지만, 트럼프 측은 즉각 상소하며 정책을 강행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협상 결렬 시 감당해야 할 25% 관세라는 최악의 시나리오 외에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25% 관세를 받아들이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의 장기적 파급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연간 200억 달러씩 10년간 집행되는 투자금이 국내 제조업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요구하는 비관세장벽 철폐와 지적재산권 강화 등 추가 양보 사항들이 한국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최근 “내년 미국 시장 괜찮아”라며 낙관론을 폈지만, 자동차 업계 내부에서는 15% 관세도 여전히 부담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중국산 전기차와의 가격 경쟁력 확보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관세 협상을 통해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정부의 전략적 준비 부족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은 예견된 일이었고, 그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정책 역시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협상 테이블에서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EU처럼 다자간 공조 체제를 구축하거나, WTO 제소 등 국제 통상 규범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을 병행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국 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신흥시장 개척을 서두르는 등 중장기 대응책도 필요했다는 평가다.
정부는 11월 14일 MOU를 체결하며 협상을 마무리했지만, 이 합의가 한국 경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플랜B 없는 협상’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한국이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어떻게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할 것인지, 정부의 근본적인 자세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https://domancar.co.kr/%ec%83%88%eb%a1%9c%ec%9a%b4-%ed%8f%ac%ec%8a%a4%ed%8a%b8-2/
https://domancar.co.kr/%ec%83%88%eb%a1%9c%ec%9a%b4-%ed%8f%ac%ec%8a%a4%ed%8a%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