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이오닉 5 / 사진=현대자동차
현대 아이오닉 5 / 사진=현대자동차
자동차 업계에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사인 중국 CATL의 쩡위췬 회장과 회동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 배경에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SK온을 핵심 배터리 파트너로 삼아온 현대차의 이번 행보는 국내 배터리 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 따르면 정의선 회장은 지난 11월 베이징 CATL 본사를 방문, 쩡위췬 회장과 배터리 협력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만남은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배터리 공급망 재편에 본격적으로 나섰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히 쩡위췬 회장이 2025년 10월 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했을 당시, 현대차 핵심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하며 양사 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기아 니로 EV / 사진=기아
CATL이 현대차에게 매력적인 카드로 부상한 배경에는 가격 경쟁력이 자리한다. CATL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는 기존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 대비 30% 이상 저렴하면서도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CATL 배터리는 국산 배터리보다 10~20% 저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이미 코나 일렉트릭, 니로 EV, 레이 EV 등 중저가형 전기차 모델에 CATL의 LFP 배터리를 적용하며 협력 관계를 구축해왔다. 더 나아가 2025년 7월에는 기아 EV5에 CATL의 삼원계 NCM 배터리 납품을 성사시키며 프리미엄 배터리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는 CATL이 단순한 저가 배터리 공급사를 넘어, 고성능 배터리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 코나 일렉트릭 / 사진=현대자동차
업계는 쩡위췬 회장의 방한 배경에 현대차그룹과의 협력 논의가 최우선 순위였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CATL은 현대차의 유럽 공장 생산 차량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헝가리 등 유럽 지역에 대규모 생산 기지를 구축하고 있는 CATL은 현지 조달 효율성과 원가 절감 측면에서 현대차에게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기준, 현대차의 유럽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약 4%에 불과하다. 중국 BYD 등 경쟁사, 그리고 저가형 중국 배터리를 탑재한 유럽 차량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기차 생산 원가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배터리 가격 경쟁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CATL은 2024년 기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 37.9%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1위를 수성하고 있다. 테슬라, BMW, 폭스바겐 등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이미 CATL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폭스바겐은 2023년 CATL과 240억 유로 규모의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업계는 2030년까지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70% 이상이 CATL과 직간접적인 협력 관계를 맺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대차가 CATL과 협력 수위를 높여감에 따라 SK온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는 아이오닉 5, EV6, GV60 등 주요 전기차 모델에 SK온의 배터리를 탑재해왔다. 하지만 최근 SK온 배터리의 가격이 경쟁사 대비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현대차 내부적으로 배터리 공급선 다변화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SK온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겠지만, 보급형 전기차에는 CATL의 저가 배터리를, 고급 모델에는 SK온의 프리미엄 배터리를 사용하는 투트랙 전략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대차는 2025년 출시 예정인 보급형 전기차 캐스퍼 일렉트릭에 중국산 배터리 적용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배터리 업체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격 경쟁력이다. CATL 대비 20~30% 높은 가격 때문에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가격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보급형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배터리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CATL이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또 다른 이유는 국내에 탄탄하게 구축된 삼원계 배터리 공급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고가 전기차에 탑재되는 하이니켈 NCM 배터리 개발에 주력해온 덕분에, 관련 인프라가 중국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LFP 배터리에 이어 삼원계 배터리 시장에도 진출하려는 CATL은 한국 공급망을 활용해 기술력을 고도화하려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2025년 8월부터 10여 명으로 구성된 CATL 실무진은 피엔티, 씨아이에스, 한화모멘텀, 필에너지 등 국내 주요 배터리 소재·장비 업체를 잇달아 방문해 기술력을 면밀히 점검했다. 한국 기업의 기술력을 분석하고 구매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지만, 현대차는 이미 해결 방안을 모색 중이다. CATL은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포드와 협력, 미시간주에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 역시 CATL과 제3국 합작 공장 설립 또는 기술 라이선스 방식의 협력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전문가는 “CATL의 기술과 설비를 활용하되 미국 또는 유럽 현지에서 생산하면 IRA 규제를 우회할 수 있다”며 “포드가 이미 이러한 방식으로 CATL과 협력하고 있어, 현대차도 유사한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배터리 업체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협력 파트너로서 사업 확장 시도는 지속될 것”이라며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기술력은 앞서지만 원가 경쟁력에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업계에서는 빠르면 2025년 하반기부터 현대차의 일부 모델에 CATL 배터리 적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배터리 공급선 다변화가 필수적”이라며 “다양한 배터리 파트너와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밝혔다. 정의선 회장의 이번 결정은 국내 자동차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와 제네시스 브랜드에도 CATL 배터리 적용이 검토될 수 있으며, 이는 국내 배터리 생태계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 및 배터리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혁신과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정의선 회장과 CATL 쩡위췬 회장의 만남은 전기차 시장의 새로운 판도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