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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치즈 Sep 18. 2019

1교시 - 해부학

시험과 그 이후

 막상 시험을 보면 시험 직전의 긴장감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나 더 머리에 넣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콩쥐팥쥐에서 독에서 물이 새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시험지를 보면 그 다음부턴 어쩔 도리가 없는거니깐~

 해부학 시험은 적당히 족보를 타고, 적당히 탈족(=족보 이외에서 문제 나오는 것)도 했다. 실습 땡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학번부턴 골학 시험이 따로 없고 해부학 땡시 볼 때 뼈 2문제씩을 추가한 점이 특이한 점이었다. 항상 땡시에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살다보면 왠지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왠지 이 문제의 답은 A같지만 그건 사실 함정이고 B인거 같은...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퇴각할 때 두갈래길이 나오는데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길은 적이 꾸며낸 술수여서 그 쪽길로 가야 안전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그것과 비슷하달까.(결국 관우를 만나고 목숨을 구걸하게 되지만)


 찜찜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봤을거라고 생각했다.

 해부학 수업은 필기 점수와 땡시 점수를 합해서 나온 등수를 꼬리표로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다. 앞 번호부터 차례대로 나와 자기 등수가 적힌 얇은 종이 쪼가리를 받는데 잘 본 사람은 탄성을,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주머니에 넣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몇등일까? 첫 시험이니깐 절반 안에만 들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상은... 내 인생에서 처음 받아보는 등수였다. 처음엔 잘 못 받았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의 맨 처음이 부정이지 않은가?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하니 그렇게 되더라.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지난 1달, 학교에서 그렇게 아둥바둥 살았던 내 모든 순간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고, 나를 믿고 계시던 부모님껜 어떻게 전해드려야 되나 고민도 됐다. 4월이니 봄 날씨가 한창이었는데 내 마음과 왜 이렇게 대비가 되던지. 고등학교 때 단순히 외우기만 했던 황조가 같은 시들의 말귀가 살아 움직여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해부학 1차 시험이 끝나고, 주말이 지나니 다시 원래로 돌아가야 했다. 오전의 이론 수업, 오후의 실습.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험 결과의 충격과 슬픔을 만끽하기에 이 곳은 너무나도 정신없고 삭막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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