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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치즈 Mar 14. 2020

응급실 혈투

응급한 자와 응급하지 않은자

"내가 지금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지 알아?"

응급실에서 근무하면 정말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응급하다고 생각해서 응급실에 들어왔는데 몇시간 동안이나 의사를 보지 못하니 화가 날 수밖에. 그러면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이 있다. 왜 응급실인데 응급하게 봐주지 않는 것일까?


응급실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응급'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른데에 있다.

일단 의료진은 환자의 증상을 보고 응급함을 판단한다. 제때 진료가 행해지지 않았을 때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응급한 것이다. 이것은 통증의 강도와는 차이가 있다. 뼈가 뿌러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죽을 것 같아도 감각이나 움직임에 이상이 없으면 응급하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넘어져서 척추 아래쪽에 뼈에 금이 가서 들어오신 분 중에 통증을 많이 호소하진 않으시지만(보통 누워계시긴 한다) 변을 지리신다는지, 감각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은 응급에 해당돼 의료진이 바로 투입된다.

반면 환자에겐 응급이란 좀 더 추상적인 이미지에 가까운 거 같다. 상처가 깊게 생겨 피가 많이 난다든지, 빙판 길에서 추돌사고가 생겨 정신이 없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응급실까지 오시는 거긴 하지만 의료진이 보기에 곧바로 처치를 하는 것이나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고 판단되면 응급하게 볼 필요성이 떨어지게 된다.


신기하게도 응급실은 환자가 몰리는 시간 때가 있다. 오전 11시경, 오후 6~10시가 그렇다. 문젠, 응급실 환자는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가지를 물어봐야 하기 때문에 일반 외래보단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또한 응급실에 있는 의사는 '응급의학과'소속 의사다. 만약 다른 과 의사의 소견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의뢰를 드리는 형식으로 진료를 요청하는데, 그 과의 의사가 응급실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자, 여기서 한국 의료의 문제점이 대두된다. 한국 대학병원의 의료진들은 항상 바쁘다. 환자를 많이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여유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각 과에 응급실 콜을 받는 의료진이 정해져있지만 그들은 응급실 콜만 받지 않는다. 따라서 응급실에서 그들에게 연락을 해도 그들이 바로 올 수 있는 여력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뼈가 부러져 정형외과에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해당 선생님께서 수술방에 불려 들어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 시스템의 피해자는 환자다. 30분 정도면 진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서 들렸는데 3시간이 지나도 내 아픈 데를 치료해 줄 의사를 볼 수 없고, 반면진료를 시작했기 때문에(응급의학과에서 초진은 보통 빨리 볼 수 있다) 마음대로 퇴원할 수도 없는 진태양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응급실에 수술이나 입원을 위해 오는 분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예전엔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르나 요즘은 택도 없는 소리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응급의학과 선생님들의 짜증을 제대로 살 순 있다. 물론, 정말 응급한 경우엔 시술을 위해 잠깐 입원했다가 퇴원하시거나, 운이 좋아 교수님 수술 스케쥴이 비어있다면 수술을 받을 수 있긴하다. 하지만 이 희미한 찬스를 위해 응급실로 향했다간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거절과 함께 다른 1~2차 병원으로 추방될 수 있다.


또한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응급처치를 하는 곳이지 다양한 시술을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응급실에 정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응급실은 응급한 환자를 덜 응급하게 만든 후 다른 과로 안전하게 넘기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동네병원에서 진료 볼 수 있는 사항이면 그 쪽으로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돈도 덜 내고(응급실은 같은 의료행위에도 더 비싸게 받는다), 서비스도 훨씬 더 기대할 수 있다. 필자도 한번 장염에 걸렸다가 정말정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새벽 3시에 응급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염증 수치와 탈수 소견이 보여 수액과 항생제만 맞고 바로 퇴원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사실 바랄 수도 없는 곳이 응급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때 동기 인턴들이 쉬고 있다가 새벽3시에 일해야돼서 나에게 볼맨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정리하자면 응급실은 근처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가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렇지 않으면 방치되다가 마음에 상처만 받고 올 가능성이 높다. 의사들도 잘 봐주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흉부외과 선생님들만큼 힘들게 일하셨던 기억이 있어 항상 안쓰러운 마음이 있다. 같이 응급실 인턴 했던 분중 2명이 이번에 1년차로 응급의학과를 들어갔는데 부디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4년 잘 트레이닝 받아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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