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배 와서 참여했던 첫 과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다음 과제에서 담당할 업무에 대해 논의할 차례가 됐다.과제 도중에 퇴사하여 부서원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기존에 담당하던 업무가 아니라 중요도가 낮은 업무를 맡고 싶다는 의사를 부서장에게 전했다. 투닥거리긴 했어도 결국엔 정이 들어버린 사람들이라 민폐를 줄이고 싶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신입사원이나 하는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이부서원들에게는 의외였나 보다. 혹은, 기존 업무를 같이 진행했던 일부 인원들에게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보지 말자" 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동안 나름대로 퇴사할 거라는 뜻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 알아차렸던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D님, 이번에 새로운 업무 맡으셨더라고요?"
"네, 사실은 FPGA 기초부터 쌓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요~"
몇몇 부서원들이 자리로 찾아와 새로 배정된 업무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내 입장에서는 스웨덴에 메모리 기업이 없기 때문에 특화된 업무를 맡아봐야 결국엔 쓸모없었다. 그냥 범용성이 높은 FPGA 업무가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퇴사하겠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 내 의사소통 능력부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다른 쪽에서 터졌다. 하던 업무를 놔두고 다른 업무를 지망해서인지, 혹은 입이 방정이지 고과면담에서 "라" 맞을 줄 알았다는 소리를 해서인지, 아니면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서장의 어그로가 끌렸다. 그때부터 ㅇ님이 부쩍 신경 쓰기 시작했다.
원했던 FPGA는 신입사원들이 입사 첫해에 담당해 왔기에 어느새 경력이 차버린 내게 맡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놀고먹겠다는 심보가 보여서 지망하는 업무를 배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에 칩 주변부 관련 IP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ㅇ님은 바쁘신 와중에도 전반적인 개념이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내겐 오히려 부담이었다. 다크템플러처럼 눈에 띄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 타이밍 잡고 런칠 생각만 하고 있는데, 뜻밖의 지도편달을 받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가뜩이나 의욕도 없는데, 서로에 대한 기대치 차이도 심해 날이 갈수록 긴장감이 깊어졌다.
그러다 뺀질거리는게 결국 들통나서 몇 차례 일대일 커피 타임으로 이어졌다. 당시엔 그의 말이 편하게 하는 일상적인 대화인 줄만 알았는데,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뻐팅기는 부서원을 챙겨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결국엔 경쟁인데, 그렇게 8시간만 땡치고 가면 D님이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네, 살아남지 못해서 여기서 끝내려고요.')
"이타적인 이유가 아니라 저는 제가 잘 되기 위해서 돈을 벌어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풍족함을 누리는 거예요."
('네, 그러다 뒤통수 겁나 쎄게 맞아서 더는 안 하려고요.')
이렇다 보니 서로의 길은 교차점을 지나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소 귀에 경을 읽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 신경 써도 바뀌질 않으니 쌓인 감정과 바라지도 않았던 신경을 받아서 쌓인 감정이 부딪혔다. 답답함, 짜증, 억울함, 분노 등 복잡한 감정에 눈물이 터져 나오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서로 힘드니 그냥 지금 말할게요. 저 N월 말에 퇴사하려고요."
ㅇ님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부서장으로서 처음 겪어보는 부서원의 퇴사였기에 당혹스러웠을까? 혹은 순간적인 감정에서 나온 소리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의심스러웠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몇 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 내게 퇴사의사가 여전한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바로 다음 단계인 파트장과의 면담을 진행했고 그 자리에서 부서에 적응하며 느꼈던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에 대해 얘기했다. 어찌 됐건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에 부서에 나름대로 도움이 될만한 피드백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내부적인 코멘트가윗선의 귀에 들어가서 결과가 좋았던 꼴을 이제껏 본 적이 없어서 이후의 면담들에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임원급 면담에서 어떻게 얘기할지 미리 준비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맡았던 일을 거절할 때 유용한 말하기 템플릿이 있었다. 감사로 시작해 여전히 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뒤, 거절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다음에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할지를 전하라는 요지였다.
담당임원과의 면담에선 책의 지침에 따라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선, 부서에 배치되어 함께 일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과제도 함께하고 싶습니다만, 가슴 한 편에 스웨덴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사를 희망하지만, 퇴사일 전까지 업무 정리나 인수인계는 확실히 마무리짓겠습니다."
의외로 그는 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별별 사유로 퇴사한 다음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들 하이닉스에 가있더라면서, 나도 그런 거 아닌가 캐물었다.
그때 확실히 시야가 다르다고 느꼈다. LSI에서 퇴사한 지인들은 인텔이나 구글, 퀄컴 등 글로벌 기업으로도 이직했다. 하지만 메모리라면 옮겨 봐야 하이닉스 정도구나 싶었다.
"어차피 이 쪽 업계에 있으면 나중에 다 거짓말한 거 알게 돼."
"네, 그럴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몇 년 더 일하면서 경력 더 쌓으면 좋을 텐데. 뭐 분야를 옮길 거면 빨리 가는 거도 괜찮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사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서일까? 붙잡아봐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팀장과의 면담은 달랐다. 준비했던 첫 줄을 다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 소린 집어치우고, 왜 나가려고?"
교수로 오래 일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팀원의 퇴사가 평가에 들어가서인지는 몰라도 시작부터 까칠했다. 그 짜증 섞인 목소리와 울긋불긋한 얼굴색에, 좋게 포장한 말로는 넘어갈 수 없겠다고 직감했다.
"스웨덴이란 나라, 그리고 그 기업들이 왜 안 망하나 알아보려고요."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
"삼성에서 일하며 결국 돈을 벌려면 직원들을 갈아 넣어서 성과를 내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웨덴은 국가나 기업이나 근무시간도 짧고 복지혜택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은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태되어야 하는데, 왜 아직까지 망하지 않았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어서 스웨덴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손을 떠났다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노기는 남아있었지만. 한숨을 푹 쉬더니 "좋은 경험이되겠네"라는 말과 함께 면담이 끝났다.
팀장 면담만 남았을 즈음해서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으니 부서원들에게도 퇴사한다고 말했다. 놀랍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는데, 이미 나와 함께 전배 왔던 인원 중 두 명이 먼저 퇴사를 했는데도 진짜 예상 못 한 건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예의상 못 한 척 한 건지 모르겠다. 아, ㅇ님을 빼면 날 신경 썼던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이후로는 담당하던 업무와 관련해서 부서원들이 물어보면 알려주고, 혹시 일이생긴다면 참고할 수 있게 항목 별로 업무내용과 코멘트, 관련 자료들을 엑셀로 정리했다. 퇴사하고 난 다음에도 물어볼 일이 생긴다면 편하게 연락하라고도 말해놨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부서에서 업무적으로 연락이 온 일은 없었다.
업무 정리 및 인수인계이외에는 인사과 면담 등 자잘한 일들만 남았다. 시간도 널널했겠다 지인들과 만나 아침에 커피 한잔, 오후에 커피 두 잔 마시면서 회사생활을 통틀어 가장 쾌적한 시기를 보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말년병장이 따로 없었는데, 퇴사 이후에도 한동안 좀 쉴 생각이다 보니 그때보다 더 편했다. 다만, 퇴근 후에는 스웨덴에 짐을 부치거나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 지인들을 만나느라 오히려 훨씬 바쁘고 정신없었다.
내가 삼성을 떠났듯, 삼성도 나를 떠났다. 이제는 그냥 마음 맞았던 사람들 몇몇과 뜨문뜨문 연락하는 정도다. 서로에게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딱 좋은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