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오는 비
비가 오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 시절에는 한 시간쯤 비를 맞으며 걸어 다닐 정도였다.
우산을 일부러 안 챙기는 날도 많았다.
비를 맞는 것이 좋았다. 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다만 한 가지는 고쳐 말해야겠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억세게 내리는 비는 좋지 않다.
그건 그냥 힘들다. 우산이 없으면 더 힘들다.
그러니까,
적당히 오는 비가 좋다고 해야 맞겠다.
비 오는 소리, 그 냄새, 물이 고인 곳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게 좋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좋다.
이유를 모르는 채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비가 그렇다.
오늘도 출근했는데 비가 왔다.
점심을 먹고 한참 비 오는 장면을 봤다. 특별히 뭔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봤다. 빗방울이 바닥을 치는 것, 고인 물 위에 동그라미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
그러다 다이소랑 마트에 들러서 간식거리를 사왔다.
비 오는 날 점심, 그 잠깐의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차 안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차 유리에 빗방울이 붙었다가 흘러내리고,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고,
바깥 소리가 조금 멀어지는 느낌.
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그냥 빗소리와 다르다.
한 겹이 더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이면 걱정 거리가 하나 생긴다.
내 차다.
150만 원짜리 차를 팔고 500만 원 주고 산 중고차
나한테는 새차 느낌이지만, 연식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공간이다.
비 오는 날 빗속을 달리는 게 쉽지는 않다.
한 번은 비 오는 날 차가 크게 휘청한 적이 있었다.
엄청난 공포였다. 그 이후로 비 오는 날에는 천천히 달린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20만 킬로를 넘긴 차와 비가 만나면, 천천히 가는 것이 정답이다.
퇴근길 차에 시동을 걸었다. 첫 번째로 나온 노래가 빗물이었다.
영화 ‘수상한 그녀’ OST, 심은경 씨가 부른 노래였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그 노래가 나왔다.
와이퍼가 움직이고, 빗소리가 유리를 두드리고, 그 위로 노래가 흘렀다.
집에 가는 길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빗속이라서 천천히 달렸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노래를 듣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