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했는데, 과거를 한 바퀴 돌았다

어제는 비가 왔고. 오늘은 산책을 당했다.

by 덕용안

어제는 비가 왔고. 오늘은 산책을 당했다.


리드줄 끝에 강아지가 있었고, 반대편 끝에 내가 있었다.

어릴 때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었다.


이불만 깔려 있던 내 방에 들어와 오줌을 쌌고, 그 당시 패드 같은 건 없었다.

아니면 그냥 관심이 없었던 건지 그 구분이 아직도 잘 안 된다.


한 번은 물린 적이 있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로 확신이 생겼다.

나는 강아지를 키울 인재가 아니라는 것을


집에 오던 길이었다.

앞에서 여자와 대형견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보더니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주인도 통제가 안 되는 것 같았다.

리드줄이 팽팽해졌고, 개는 앞발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망가지 않았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발이 안 움직였다.


그렇게 개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달렸다면 물렸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맞았는데,

용감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굳어버린 건지 그건 아직도 모르겠다.




친척들이 마트에 들어갔다. 강아지와 나만 남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이었다. 골목이 낯설지 않았다.

발이 먼저 알아채는 길이 있다. 머리가 기억하기 전에 방향을 튼다


그 길이 그랬다. 강아지가 코를 땅에 박고 뭔가를 맡는 동안 나는 그냥 걸었다.

골목을 돌자 그 자리가 나왔다.


친구들끼리 비비탄 총싸움을 하던 곳이었다. 담벼락이 그대로였다. 바닥도 그대로였다.

나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그곳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대로였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강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리드줄을 당겼다.


조금 더 가자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관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없다. 건물만 남아 있다.

그날 아침 넘어졌다. 먼지가 묻은 채로 그냥 들어가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닦고 들어가면 됐을 텐데 그냥 들어갔다.

사진관은 사라졌는데 그 먼지의 감각은 아직 손바닥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더 올라가면 옛 원주역이 나왔다.

건물은 그대로였다. 역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사람의 흔적만 없어진 것이었다.

매표구가 있던 자리, 사람들이 줄을 섰을 자리 건물은 남아 있는데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사라진 것보다 그게 더 이상했다. 없어진 게 아니라 비워진 것이었으니까.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영화관이었던 자리가 나왔다.

건물 하나에 상영관 하나. 그런 영화관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구조인데,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내 첫 극장 영화가 거기서였다.


아마 장화홍련이었을 것이다. 문근영 씨가 나오던.

왜 그 영화를 첫 번째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서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거기서 봤다는 것만 남아 있다.


걷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고양이는 길 위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다.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다.

리드줄 끝에 사람이 있거나, 마당 안에 있거나.

어릴 때는 달랐다.

주인 없이 골목을 돌아다니는 강아지가 꽤 있었다.

지금은 그런 장면을 거의 보지 못한다. 세상이 바뀐 건지, 내가 사는 동네가 바뀐 건지 잘 모르겠다.


강아지와 나는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다.

산책이라는 이유로 걸었는데 걷다 보니 그게 산책이 아니었다.

비비탄 골목, 먼지 묻은 증명사진, 사라진 역, 첫 번째 영화. 강아지는 냄새를 맡으며 걸었고,

나는 기억을 맡으며 걸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오늘 느꼈던 것을 온전히 글로 남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빈 역터의 넓이도, 첫 영화관 건물의 낡은 외벽도 글이 되는 순간 조금씩 다른 것이 되는 것 같다. 조금 다른 것이 되더라도,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기억은 장소를 그대로 두고 혼자 흘러간다.

그래서 오래된 골목을 걸으면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갑자기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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