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친 입술처럼 선생님의 미간이 씰룩였다. 당황한 마음을 들켰을까 하는 염려로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손가락을 까닥이며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이 적절한 충고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학기 초 면담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날 잠시 보육원에 맡겼다는 이야기를 할 때 선생님의 손가락은 형세를 살피는 바둑기사처럼 쉴 새 없이 까닥였었다. 그래서 지금도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을 때, 선생님의 손가락은 날카로운 초승달 모양으로 슥- 미끄러졌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한 달에 한두 번은 찾아오고 있으며,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집을 잡아 날 보육에서 데리고 나갈 거라고 하자, 손가락은 다시 경쾌하게 책상을 두드리며 희망과 용기의 단어를 골라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시기 어린 질투 때문에 기회를 망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이번에는 손가락이 짧은 쉼표 모양으로 책상을 슬쩍 긁었다. ‘어떻게 그렇게 어른스럽냐, 네가 나보다 낫다’ 이런 말들을 하기 전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학기 초부터 한 달에 한두 번씩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면서 알게 된 당신의 버릇들은 면담을 한층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학생에게 적절하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담임 선생님께 주면서도 가끔 당황스러운 질문을 하면서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본의 아니게 어른들의 그 ‘진심 어린 말씀’들을 기회가 많았던 나이기에 선생님의 충고가 색다르거나 감명 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따뜻하고 진심 어린 태도로 대해주는 유일한 어른이 담임이었기에 보육원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의 심리를 핑계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면담이 꼭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다. 마치 장롱에 걸어 둔 좀 오래된 스카프 같다고나 할까. 봄날의 화려한 외출에 대한 욕심만 버린다면 버려질 염려 없이 한켠에 걸려있기에는 충분한... 나는 꽤 안정적인 상태였다. 엄마와 떨어져 있긴 했지만, 밤마다 훌쩍이는 나이도 지났고 주말이면 엄마 방에서 잠을 자고 오기도 했다. 성적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서울 중위권 대학은 갈만했고 - 사실 선생님이 날 대견하게 보는 부분 중 성적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 학비나 급식비는 지원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짓궂은 마음으로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 것은 물론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유일하게 따뜻하고 진지한 태도로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담임 선생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인생을 대신 살아라도 줄 것처럼 “지금처럼 하면... 사회는 니들 생각처럼 쉽지 않아... 원래 그런 거에는...”마구잡이로 간섭하다가 정작 필요할 땐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잠깐은 나의 불우한 영원을 만든다는 것을 나는 서서히 깨달았고 그것이 ‘어른’이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 어떤 ‘잠깐’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듯 보였다.
‘어른’ 같으려고 노력하는 ‘나이 많은 사람’. 그것이 담임 선생님과 면담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맨날 담임 차지하려고 꼬리를 친다는 비난을 감당할 만큼, 옆에서 보는 그의 턱선은 꽤 근사하다.
<심사위원 A>
“시청자 분들은 지은 양의 노래가 왜 잘하는 노래인지 모르겠다고 하시지만, 음악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가식 없는 목소리에 진정성 있는 감성이, 듣는 이를 공감하게 하는 능력이 탁월해요. 특히 그 감정의 깊이는... 어후... 감히 어떻게 평가하기도 힘들죠. 현장에서 직접 들어본다면 평가가 달라질 거예요. 다만 고음을 내거나 감정에 몰입할 때면 어깨가 좀 움츠러들고 목구멍을 좁히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아마 시청자분들 귀에는 좀 거슬리지 않나, 하지만 그건 금방 고쳐져요. 아무튼 오늘 노래 정말 잘 들었습니다. 저에게 큰 감동을 주셔서 감사해요.”
<심사위원 B>
“음... 저도 어릴 적에 집안이 어려웠어요. 가난이 어떤 힘듦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셈이죠. 그때 제게 힘이 돼준 게 음악이고, 특히나 춤이었어요. 춤을 통해 위로받고 힘을 내고 흠... 지은 양의 노래를 들으면 마치 제 청소년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음악적으로 다른 두 분 심사위원보다 아는 것은 없지만 오히려 더 대중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게 게 입장이거든요.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대비해 볼 수 있다면 훌륭한 노래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오늘 노래는 저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고 봅니다.”
<심사위원 C>
“지은 양... 오늘 노래 좋은데요! 괜찮아요!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노래하면 전 어디 가서 지은 양 노래 최고야라고 엄지 세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시고, 아까 다른 심사위원 말씀처럼 어깨 당당히 펴시고 목구멍, 하하하 같은 목구멍인데 내가 하니까 왜 이렇게 가볍게 들리지? 하하하. 성대를 크크크 성대를 크게 여시고 배에 딱 힘주시고 노래하시면 됩니다, 아셨죠? 제가 응원할게요! 지은 양. 오늘 노래 좋았습니다.”
세 번째 심사를 통과했다. 첫 번째 심사를 통과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어려운 가정형편을 팔아서 동정표를 얻었다고 했다. 화면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나도 낯설었고, 그런 비난이 어쩌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어려운 가정형편만 부각되어 편집되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노래를 향한 열정을 잃지 않은 순수한 고2 여학생, 그게 나였다. 그런 사연 팔이와 달리 내 노래나 춤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음색이나 깊이가 남다른 것도 아니었다. 떨어진 참가자들 중에 나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들이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하지만 방송도 현실인데, 방송사 입장에서는 그만그만한 실력에 내세울 게 없는 참가자보다는 화제성 면에서는 내가 더 나았을 것이다. 덕분에 그래도 세 번째 미션까지 잘 통과했고, 이제 한 번만 더 통과하면 생방송 무대에 나갈 수 있었다. 예쁘지도 않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심사위원들 꼬신다는 비난까지 들었고, 나도 모르는 내 과거가 여기저기서 폭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의 칭찬은 나를 더 분발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난 꽤 괜찮은 학생이고, 그러기에 질투 섞인 치기 어린 비난은 감내할만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서 앉아 본 것이 얼마 만인가?
그것도 인기라고 일하는 식당에 딸린 작은 엄마 방에 가려고 해도 이래저래 눈치가 보여 이번 주말에는 핑계 김에 엄마와 가까운 도시로 여행도 도피도 아닌 어설픈 떠남을 가졌다. 주말마다 내 얼굴이 TV에 나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기에 모텔에서 엄마랑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엄마의 얼굴은 꽤 밝아졌다. 아니 환해졌다고 해야 하나? 여기저기서 딸 얘기를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게 내 눈에는 그렇게 보기 싫었다.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면 환해질수록 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런 데를 널 데리고 오다니 좀, 그렇지? 하지만 곧 좋아질 거야. 그땐 좋은 데서 자자”
환하게 웃는 엄마 얼굴에 기어이 짜증이 터지고 말았다.
“오기는 와. 그때가. 맨날 같은 소리야!”
소리를 빽 지르고 욕실로 들어와 버렸다.
욕조에 물을 받고 그 안에 몸을 뉘었다. 눈물이 나냐고? 눈물이나 흘리던 사춘기는 벌써 지났다. 지난겨울방학 때, 동계 올림픽을 보다가 엄마가 당신도 모르게 했던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쟤 엄마는 좋겠네. 올림픽을 그것도 2번씩이나. 저 집은 팔자 폈네.”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딸 때의 그 집 풍경. 사람들의 환호 소리, 이웃 사람들 인터뷰, 부모님 인터뷰.
으레 보고 듣는 그림과 소리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슬쩍 화장실을 가는 척했고, 사춘기를 지나고 나서는 처음으로 변기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후”
뜨거운 물에 적응이 안 된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또다시 코끝이 찡해왔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나 부담이 아니었다. 그냥 엄마가, 내가 불쌍했다. 그래서 다시 사춘기로 돌아가려는 나를 나는 추스르려야 했다.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릴랙스”
나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아빠의 말을.
욕조에 누워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린 내가 듣기에도 저 깊은 어디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던 단어.
두 무릎을 세워 양팔로 감싸 안고 무릎 사이에 이마를 대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덟 살 이후로 십 년 동안 아버지는 곁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특별히 뭘 살게 있어서 들른 것은 아닌, 그냥 들어간 슈퍼에서 우연히 집어 든 라면으로 뜻하지 않은 저녁을 먹는 것처럼 아버지는 내 곁에 점점 ‘없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가끔 그러나 깊숙이 자신의 부재를 알려오는 아릿한 추억, 아버지.
“우리 지은이는 벌써 이렇게 컸네. 아버지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낫다. 아구 아구 우리 딸. 우리 공주님은 아빠에게 감동 그 자체예요. 아빠 우주만큼 감동했어요. 아빠를 위로해주는 우리 딸 때문에 아빠 힘 나요. 아빠 꼭 나을게요. 그러니까 우리 딸 자신감 있게 어깨 당당히 쫙 펴고 배에 힘 꽉 주고 생활해야 돼요. 아빠가 언제나 응원할게요. 우리 딸 파이팅.”
돌아가시기 며칠 전,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아빠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얼른 나으세요. 사랑해요.”라고 삐뚤빼뚤 쓴 글씨 옆에는 병실 침대에서 일어서 밝게 웃는 아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무릎에 붙인 이마를 들었다. 흐린 물기 사이로 아버지가 보였다. 눈물을 닦으며 나지막이 불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