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oon 1월 호 연재소설
19층 상무이사 실에서는 회사 앞 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창문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갯벌 위에 파란 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물이 밀려나간 틈을 타 집게발로 구멍 속의 흙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갯벌은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흙 대신에 딱딱한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었다.
“정규직 전환 사수하고, 임금 협상 다시 하자!!”
그들이 걸어 놓은 플래카드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위에서 내려다본 그들의 주먹은 명멸하는 백열등 같았다.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허무한 그들의 손과 달리 내 손에는 ‘꿈’이 들려 있었다. 박 과장이 주고 간 까만색 명함 중앙에 금박이 입혀진 夢자가 새겨져 있었다. 똑같이 금박이 입혀진 동그란 테두리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꿈’. 명함 뒷면에는 ‘일식집 夢’이라는 제목 아래 간단한 약도와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지에서 떨어져 도로에 수북이 쌓인 파란 꽃들의 시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창틀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앉아 있어야 할 파란 잠바는 구름처럼 포근한 이사 실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시위 대책 본부장인 윤 상무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박 과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멈칫거리는 내게 어서 앉으라는,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당황할 것 없어. 내가 설명하겠네.”
일곱 시 오십 분, 나는 그의 앞에 앉으며 비어있는 책상과 그 뒤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윤 상무는 여덟 시 전에 출근을 한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과 곧 윤상무가 출근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사양할 것 없다는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담배를 거둬 자기 입에 물었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윤상무가 출근해서 박 과장과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본다면...
“긴장하지 말게. 상무님은 있다 밤에나 만날 수 있을 거네.”
테두리 안에 갇혀 있던 夢자가 꿈틀거렸다. 꿈틀꿈틀 몸을 비틀던 ‘꿈’은 불에 닿은 플라스틱처럼 여기저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기를 둘러싼 테두리에 닿으면 전기가 옮은 듯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다시 꿈틀거렸다. 몇 번 짜르르한 전기 맛을 본 글자는 이내 적응이 됐는지 이제 테두리에 닿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돼지의 옆구리가 보였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옆구리 살이 이번에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철창을 위협하고 있었다. 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옆구리 살은 결국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고 빈틈을 발견한 옆구리 살은, 아니 글자는 더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어렵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테두리는 결국 쩍 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워...웩”
등짝에 달라붙은 내 배에서 장기들이 한꺼번에 쏠려 나오는 것 같았다. 진득한 액체가 눈 주위를 흥건히 적셨다. 눈가를 닦으려고 손을 드는 순간 목구멍에서 비눗방울 하나가 빠져나와 눈앞에서 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눈가를 훔쳤다. 두툼한 목도리에 둘러싸여 갑갑했던 목이 시원해졌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토악질을 해도 나오지 않던 것이... 기쁘기보다 오히려 허망한 느낌이었다.
“검증이 필요했네.”
그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돼지를 처음 본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마지막 절차라고 생각하면 되네. 한 배에 태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목숨 걸고 바다에 나가는데... 안 그런가?”
비열한 웃음이, 아니 뭔지 모를 공허하지만 뚜렷한 목적을 인지한 그런 눈빛이, 그도 아니면 침 삼키는 소리마저 낼 수 없는 강렬한 기운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아주 평범한, 그저 사무실 자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자네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이제 자네는 ‘우리’ 사람이야.”
그의 말은 ‘우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늘어진 내 귀는 ‘사람’이라는 말에 파르르 떨었다.
“뭐, 결국 선택은 자네가 하겠지만 상무님과 나로서는 이제 자네를 우리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네. 자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제가 나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대비쯤은 우리도... 뭐, 그런 구차한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 밖에 있는 저 사람들도 자네보다야 나를 더 믿지 않겠나?”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흐릿한 미소로 그렇지 않은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도 말했지? 오래 기다려줄 수는 없네.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꽤 많아. 밖에 있는 저 사람들 처리 문제도 그렇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그는 까만 명함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밤 9시까지 오게. 내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기로 하지. 상무님도 그때 뵐 수 있을 거네. 그럼 나는 이만... 아, 그리고 주인 없는 사무실에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돌처럼 굳은 내 어깨를 한 번 짚지도 않았고, 비열하거나 혹은 은근한 웃음도 없었다. 그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복사기 쪽으로 서류를 들고 가는 것 같았다.
얼굴의 액체들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귀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팔랑대던 귀가 얌전해졌다. 유리에 비친 나를 보았다. 귀가 없었다. 아니 귀가 위로 쫑긋 서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보았다. 귓구멍을 막고 있던 귓바퀴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손으로 귓바퀴 윗부분을 잡아 아래로 꺾었다 놓았다. 물에 적은 손수건처럼 흐느적거리던 귀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리에 비친 나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고, 끝이 둥그스름한 코는 적당하게 위로 솟아 있었다. 턱 선은 계란형으로 잘 빠졌고, 입은 호방하게 크면서도 입술이 얇아 촌스럽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당당하게 서 있는 귀가 보였다.
윤 상무는 여덟 시가 넘어서도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에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사무실이 있는 5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나를 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캐캥!”
뻥 뚫린 목으로 시원하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좀 다르게 들리는 기침 소리와 아침에 이불을 개다가 발견한 불그스름한 털 뭉치가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