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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원필 Feb 24. 2020

우리의 커피 맛을 찾아서

두번째작업실 분투기 - 원두 선택기

창의력이 가장 활발할 때가 언제일까요? 제 생각에는 무언가 벽에 가로막혔을 때입니다. 저희에게도 카페를 준비하면서 큰 벽이 찾아왔는데요. 바로, 커피 원두와 머신 구매였습니다. 앞 선 글들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가 매일 마시더라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커피를 제공한다는 것은 두번째작업실의 핵심가치 중 하나였습니다. 


좋은 커피 머신은 원두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장점을 끌어내어주고, 빠른 시간에 가장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늘 같은 퀄리티로 생산할 수 있었죠. 딱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가격이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커피 머신들을 보았는데요, 가격 역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신제품의 경우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도 있어 저희로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습니다. 중고 역시 만만치 않았죠. 예산의 절반 이상을 커피머신에 투자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카페를 준비하면서 '가게에 커피 머신을 들여놓지 않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예산과 관련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저희가 준비하고 있던 금촌지역 주변에 워낙 많은 카페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들과 차별성을 주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커피 머신 없이 커피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핸드드립을 이용한 카페를 운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핸드드립으로는 요즘 일반화된 다양한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음료를 만드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라테류의 경우 핸드드립 커피에 우유를 섞게 되면 맛이 너무 흐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업무 관계로 만난 지인을 통해 앤트러사이트 서교점을 처음 방문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다른 앤트러사이트 지점들과 다르게 커피머신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커피머신 대신 핸드드립과 모카포트를 이용해서 커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빙고~!!'


우리는 거기에서 착안하여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카페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모카포트는 일반적인 에스프레소 머신과 동일한 원리로, 열과 압력을 이용하여 커피를 추출합니다. 크게 세 가지 파트로 만들어진 단순한 구조의 초소형 커피머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을 담는 보일러, 원두를 담는 바스켓, 그리고 추출된 커피를 담는 컨테이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수 있고, 추출 후 세척도 핸드드립이나 프렌치프레스에 비해 편리합니다. 물론 머신과 비교한다면 추출 시간이 더 걸리고, 라테와 같은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별도의 우유 스팀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모카포트는 머신에 비해 열과 압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원두가 가진 개성을 120% 뽑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반 커피머신의 에스프레소 추출 압력이 9 bar 이상 됩니다. 반면 일반적인 모카포트는 1.9 bar 미만입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원두의 개성을 날카롭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드러내며 보다 부드럽고 차분한 맛을 통해 원두가 가진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압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모카포트 커피는 다크 로스팅한 커피를 주로 사용합니다. 저희는 압력추가 달려있어 최대 추출 압력 4 bar의 제품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압력을 높여 추출한다면, 원두가 가진 풍미를 좀 더 살릴 수 있고 미디엄 로스팅 커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카포트를 사용하기로 결정되면서 이제는 이에 맞는 원두를 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취향에 맞으면서도 모카포트와 궁합이 잘 맞는 원두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모카포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상적이란 맛이란 게 무엇일까요?

커피의 맛과 향은 일종의 취향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원두가 있고, 각 원두별로 맛과 향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 같은 지역에서 나는 원두라고 하더라도 어느 농장에서 기른 원두인지에 따라 또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지역 내 어느 농장에서 생산된 원두인지도 구분한 싱글 오리진 스페셜티 커피가 유행입니다.


우리 커피는 저의 경험을 통해 맛보았던 가장 이상적인 커피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사람마다 어차피 커피 맛의 호불호가 있을 겁니다. 어차피 취향의 차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맛에 가까운 것을 손님들에게 제안하는 거죠. 취향에 맞는 커피라면 단골이 되어 줄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 출장차 이탈리아 밀라노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이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브랜드들과 디자이너들의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국내 디자인 전문 잡지에 기고를 위해 취재차 밀라노에 가게 되었는데요, 아침부터 밤까지 수많은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출장 기간 중 어느 날 아침,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인 도쿠진 요시오카가 카르텔 매장에 방문하여 신작인 인비저블체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차 카르텔 매장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직 매장 오픈 전인 데다 인터뷰 준비 중인 모습에 저는 잠시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근처에 있는 커피 바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커피 바의 형태로 커피를 내리는 바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없이 스탠딩 테이블 3-4개가 전부인 작은 가게였습니다. 이른 아침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신문을 읽으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탈리아의 멋진 아저씨들(?)과 연륜이 있어 보이는 바리스타 한 분이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에스프레소를 한 잔 주문했습니다. 바리스타님은 빠른 손놀림과 유쾌한 미소를 건네며 순식간에 커피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잔은 제 인생 커피가 되었습니다.


1유로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싼 커피였습니다만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에스프레소 하면 생각나는 쓰고 마시기 힘든 커피가 아니라 진짜 커피의 심장을 마시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첫 모금에서 에스프레소 특유의 약간의 씁쓸한 맛이 혀끝에 닿은 뒤 고소한 견과류의 향이 잠시 뒤 강하게 따라옵니다. 두 번째 모금에서는 고소하면서도 묵직한 맛에 익숙해질 즈음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들에서 느껴질 법한 상큼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지막에는 상큼한 맛에서 부드러운 꽃 향기 같은 달콤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너무 맛있게 마신 커피였습니다. 연거푸 두 잔을 더 주문해서 마시고, 바리스타 분에게 이탈리아식으로 커피를 마시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때 내가 마신 커피 맛을 최대한 재현할 수는 없을까 하는 욕구가 솟아올랐습니다. 모카포트 추출 커피지만 그때 마셨던 커피와 같은 맛을 내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최적의 커피를 찾기 위해 많은 커피를 마셔보기로 했습니다.

국내에서 제법 유명한 로스터리들의 원두 샘플을 받아 다양한 조건에서 테스트를 해보았습니다. 우리 생각에 가장 이상적인 맛의 커피는 쓴맛은 덜하면서 산미와 아로마가 풍부하며, 고소한 맛의 밸런스가 조화로운 커피였습니다. 그래서 굳이 싱글을 고집하지는 않고 여러 블렌드도 함께 테스트했습니다.


분명, 유명 로스터리들의 원두를 그 가게에서 맛보았을 때에는 밸런스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원두가 막상 가져와서 모카포트로 테스트를 해보니 밸런스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계속되는 테스트에 우리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한 이상향의 커피 맛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일까라고 포기하는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죠.

결국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본 이상은 맛을 내주는 유명 로스터리 원두를 사용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찾아 헤매던 그 맛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카페를 하기로 결정하고 난 뒤 조언을 얻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바리스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기왕 원두를 테스트하는 중이라면 조언을 드릴 테니 같이 테스팅해보며 시음해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프로 바리스타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모카포트와 그동안 모아놓은 원두 샘플들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리스타님과 아내, 그리고 저까지 세 명은 그간 테스트해온 다양한 원두들을 맛보며 각 원두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리스타님이 본인이 사용하는 원두도 함께 시음해보게 되었습니다.


“앗, 이거야!!!”


우리가 생각하던 가장 이상적인 맛의 밸런스를 지닌 원두가 거기 있었습니다. 부드러우면서 쓴 맛은 덜하고, 산미와 아로마가 풍부하며, 고소하면서도 끝 맛은 살짝 달콤한 듯 깔끔하게 뒷맛을 남기지 않는 그런 맛이었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밀라노에 마셨던 에스프레소, 그리고 그때 그 작은 커피 바의 전경이 눈 앞에 떠올랐습니다. 


에티오피아와 케냐, 콜롬비아 블렌드로 이루어진 이 원두는 우리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에스프레소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습니다. 또한, 물을 넣은 아메리카노, 우유를 넣은 카페라테로 만들었을 때에도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았고 어떤 커피 배리에이션에도 기본을 잘 잡아주는 탄탄한 원두였습니다.


제법 오랜 시간 원두의 맛을 찾아 돌고 돌던 우리는 결국 그 원두를 이용해 카페를 운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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