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항쟁과 나의 이야기 조금
잊어서는 안 되는 아픔이 있다.
사람들은 아픔을 딛고 성장해 왔다.
그것은 시대나 국가나 개인이나 다 똑같다.
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제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소하였다. 복역 중 당한 모진 고문으로 몸이 편치 않으셨으나 또 독립운동을 하였고 다시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셨다.
군대에 있을 때와 대학생 때, 당시 한창 유행하던 노래방엘 가면 나는 꼭 다음의 세 곡만 불렀다. 광야에서(노찾사), 솔아솔아푸르른솔아(노찾사), 떠나가는 배(정태춘)가 그것이다. 중저음으로 잔잔하게 시작하여 힘이 들어가는 클라이맥스 부분이 되면 신기하게도 듣는 이 모두가 들으면서 어쩔 줄 몰라한다. 자신들도 갑자기 애국심이 들끓고 무언가가 차오른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도 뭔가 선동적인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래는 딱 여기에서 끝낸다. 더는 부르지 않는다. 사실은 잘 부르는 노래도 없긴 하다. 정태춘의 노래는 노무현 대통령 장례행사에서 불렸던 노래이기도 하다. 죽어서 신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 나는 찾아갔지만 아직 봉화마을은 못 가봤다. 그때 내가 남긴 글 때문에 YTN에서 연락이 왔고 찾아와 인터뷰도 했었다.
아주 오래전, 광주에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을 쪼개어 일부러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갔다. 진입로가 참 잘 조성된 곳이었다. 너른 묘역에 도착하니 시야는 확 터졌지만 갑자기 심장이 턱 막혔다. "아니 이렇게나..." 뭔가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내려앉아 나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일상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형과 동생, 아저씨와 아줌마가... 그들은 옛날로 치면 농사짓던 호미와 낫과 괭이와 죽창을 들고 권력자, 아니다, 권력자도 못 되는 단지 그것을 탐하는 범법조직의 잘 훈련된 초현대식 무기에 삶과 육신이 뭉개지고 으깨져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이 그곳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목숨을 버렸을까? 아니다, 그냥 의분했고 강개 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나중에 애국이라고 하였겠지!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전국에 계엄을 확대하고 김대중 등 정치인·학생 지도부를 체포했다. 이튿날 새벽, 광주 전남대 앞에서 휴교령에 항의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두들겨 맞았다. 피 흘린 젊은이들이 금남로와 광주역으로 번져 “계엄 철폐”를 외쳤다. 19일, 빗속에서도 군홧발은 이들을 뭉갰고 보다 못한 시민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합류했다. ‘학생 시위’에서 ‘시민 봉기’로 변해버렸다. 20일 해 질 녘엔 택시와 버스 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진압선을 뚫었다. 항거가 심상치 않자 범법자들은 결국 밤 11시에 광주역 앞 첫 집단발포를 했다. 그러면 겁먹고 도망칠 줄 알았나 보다. 총탄에 쓰러진 시신 두 구가 리어카에 실려 도청 앞에 놓이자, 드디어 광주가 일어섰다. “살려면 싸워야 한다.” 애국이 아니라 살고 싶은 내 소중한 가족을 지켜야 하는 절박함, 단지 그것에 불과했다. 21일, 시민들도 장갑차·트럭·총기를 확보해 무장을 했다. 하지만 무장의 질은 비교의 깜이 되지도 못했다. 전투함 앞에 어선이었다. 정오, 도청 앞에서 있은 또 한 번의 조준사격이 무장항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기죽지 않은 시민들의 엄청난 기세에 고민하던 계엄군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 도시를 포기한 채 외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자지구의 그것처럼, 잠시 휴전양상으로 22일부터 ‘시민 자치’가 시작되었다. 자율경비·헌혈·궐기대회가 이어졌지만 내부에서는 무기를 반납하자는 온건론과 끝까지 항전하자는 강경론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겁을 먹고 투항을 하든 끝까지 싸워 지켜 내든 중요한 것은 내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5월 27일로 넘어간 새벽 3시에 드디어 최정예 전차가 탱크의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무등산 기슭을 따라 내려왔다. 2만 5천 명의 대한민국 국군이,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들이 떨고 있는 도청을 포위했다. 그들이 먹는 밥과 구매한 무기는 외세로부터 국가와 영토를 지키라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또 광주 시민들이 뼈빠지게 일해서 낸 세금이었다.
오전 5시 22분, 마지막 총성이 멎었고 진압이 완료되었다. 소위 시민군은 연행되었고 광주는 죽음의 곡소리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 열흘의 항쟁으로 사망 193명(시민 166, 경찰 4, 군 23)·부상 852명, 미확인 실종자 수십 명... 국민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자들은 결국 부귀영화를 누리며 대부호가 되어 대대손손 떵떵거리고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일제의 앞잡이들과 왜 이렇게 겹치는지... 그래서 내가 더 비분강개하는지 모르겠다. 괜한 연결인가?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있은지 46년째 되는 날이다. 어느 노랫말처럼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몰랐지만 젊음의 날을 지나왔던 것처럼, 그저 사랑하는 내 가족과 이웃을 지켜려던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애국이 되어버리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갑작스러운 글을 올려보았다.
서편제 - 천년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