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 스포일러가 많이 있습니다.
희한하다. 소소하게 연신 웃음이 터지는데, 갑자기 순간 오싹해진다. 주인공의 잘못된 행동에 혀를 차다가, 주인공이 처지가 안타깝고 불쌍해진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그렇다.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르다가 변주를 주는데, 튀지 않고 물 흐르듯이 흐른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웃다가 긴장하게 만들고 그렇게 적절히 밀고 당기기를 유지하며 집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인물과 인물, 스토리와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동시에 2인자 콤플렉스의 대명사인 '살리에르'를 생각나게 했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유치원 교사 매기 질렌할(리사 스피넬리 역, 이하 리사)과 유치원생 파커 세바크(지미 로미 역, 이하 지미)가 중심축이다. 시인이 되고 싶고, 명품 시(詩)를 써서 주목받고 싶은 리사가 5살밖에 안 됐지만, 리사보다 훨씬 시(詩)를 잘 뽑아내는 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능력에 집착,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영화다.
리사의 집착은 부른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대중의 관심을 받게 한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평소 시(詩) 창작 수업에서 주변인이었던 리사가, 지미의 훌륭한 시를 훔쳐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다가 드러내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영화다. 영화는 제자의 시를 도둑질했다는 것을 감추고, 평소 리사의 시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시(詩) 선생과 뜨거운 사랑을, 나아가 납치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전개다.
욕망은 집착으로, 집착은 결국 새드 앤딩으로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마치 평생 2인자였던 살리에르(Salieri)가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것처럼, 영화에서 리사는 지미의 능력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집착한다. 자신의 역량을 키워 극복하기는커녕 교묘하게 훔치고, 빼앗는다. 아니라 다를까. 영화는 말한다. '살리에르 신드롬에 대해 말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 영화 중반에 리사가 이런 대사를 친다.
모차르트는 왕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어
살리에르(Salieri)는 이탈리아 출신 궁정 음악가로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모차르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음악가다. 살리에르 신드롬은 1인자를 넘지 못하고 평생 2인자로만 살아가는 이러한 사람의 극단적인 심리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이웃이나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살리에르 신드롬은 1인자를 넘어서지 못해 결국 좌절감과 질투, 집착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는 현상이고 영화는 이 과정과 문법을 따른다.
시(詩)가 생각날 때, 아무 때나 연락해
리사는 남편과 섹스를 하다가 중간에 끊고 지미의전화를 받는다. 남편과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지미의 시(詩)에만 있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유치원 교사로 유치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지미와 지미의 시적 능력이었다. 그렇게 리사는 5살 아이를 돌보기는커녕, 자신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타인의 비범한 재능에 집착하기만 했다.
그래서 리사는 한다. 거짓말을 거듭한다. 올바르고 정당한 방법으로 쟁취할 수 없었기에, 지미의 시(詩)로 시(詩) 선생에게 호감을 얻는다. 호감은 기회로 이어져 자신의 능력으로 설 수 없는 시 낭송회 무대에 같이 오르게 된다. 5살 아이가 평범하기 살기 바란다는 지미 아버지의 다짐은 리사에게 그저 공허한 메아리이자 흘러가는 소리일 뿐이었다. 리사는 결국 지미 부모의 동의와 허락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지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5살 지미를 빼돌린다.
살리에르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모차르트 때문에 평생 2인자로 살아야 했다. 그 역시 왕실 음악가로 실력 면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모차르트라는 천재 앞에서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모차르트를 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겠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성취가 아니라 열등감이었다. 이 열등감은 낳았다. 질투, 집착, 시기 등의 형태로 발현됐다. 모차르트가 죽음을 구고 갑론을박 논란이 있지만, 그 소문의 중심에 살리에르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살리에르의 열등감 때문에 말이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 과정을 따른다. 리사는 욕망에 점철된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띄게 되는 지를 보여줬다. '열등감'을 극복하기는커녕 남에게 집착한 살리에르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상대역으로 나온 지미도 마찬가지.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바로 이것임을 보여주며, 5살 아이의 시각과 눈높이에서 유머와 재치로 드러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이 '열등감'에 주목했다. 아들러는 열등감이 개인의 인격과 자아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고 설명했다. 열등감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이를 건강한 방식으로 풀어내면 사람이 크게 성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아들러는 비건전한 방식으로 열등감을 해소하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는커녕, 집착, 질투로 변질되고, 나아가 이것이 비인격적인 자아를 형성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삶마저도 짓밟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내용을 반영했을까. 지미 앞에 살리에르에 불과했던 리사는 그렇게 스스로 욕망에 점철된 삶을 사는 것도 모자라 결국 지미를 납치하게 된다. 시(詩)를 매개로 유부녀였던 그녀가 시(詩) 선생과 뜨거운 섹스를 한 것도 모자라, 리사는 결국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유괴'라는 흉악범죄로 폭주한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그렇게 아들러가 경고했던 열등감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인생도 망가뜨릴 수 있음을 군더더기 없이 나타냈다.
한눈에 봐도 나이차가 꽤 있어 보이는 두 배우였지만 두 주인공의 연기는 이러한 나이차를 무색하게 할 만큼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나이 차이는 그저 숫자일 뿐, 영화 속 두 배우의 연기의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끝날 때까지 보여준 명품 연기로 시종일관 몰입하게 했고, 두 사람의 연기에 탄탄한 스토리가 버무려지니 10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극 중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등장하는 리사가 어째서 시(詩)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그래서 5살 유치원생의 시적 재능에 왜 유독 집착할 수밖에 있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갈등의 원인이자 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서 리사는 대낮에 불꽃(?) 같은 섹스를 할 수 있을 만큼 남편과의 사이가 돈독했다. 갖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몽니를 부르는 아들과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의 모습은 어느 가정에서 겪는 흔한 모습이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 보조교사로 등장하는 인물과 갈등은 전혀 없었고, 유치원 교사로서 학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 느끼는 고충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사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빈곤하지 않았다.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는 상황. 왜 시에 집차게 됐을까? 의문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가장 본질적인 부분 내용이 빠져 모든 것이 완벽했던 영화에서 2%가 부족했다. 핵심을 전달하는데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아쉬움과 상관없이 대세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스토리 구성이 돋보였다. 왜 그렇게 시에 집착하게 됐는지, 그래서 지미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게 됐는가 덜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생각 거리를 던져줬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산적인 고민을 말이닽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소소한 재미를 선사했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다시 봐도 좋을, 이음새가 좋은 영화였다.
뱀 다리.
영화를 보고 시하나가 내게 왔다.
지미가 남긴 (詩)는
영화 다른 또 다른 울림을 줬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神)이 보낸 신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