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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devoy Jun 26. 2019

괘씸죄

White Bear 화이트 베어 편 (2) - 후반부

 스포일러(spoiler, 헤살)가 많이 있습니다. 


줄거리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전반부에서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공감이 결핍된 현상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콘텐츠인 스마트 기기 시대에 타인과 공감과 소통을 하기는커녕, 누군가의 고통을 수단이자 도구로, 놀이와 유흥으로 그리고 콘텐츠로 보는 상황을 지적한다. 전반부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진일보된 미디어 시대에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미디어를 다룰 것인가에 질문을 던진다.


전반부와 다르게 후반부는 이렇게 볼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빅토리아 스킬레인은 결국 정체모를 한 여성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현실을 부수러 '화이트 베어'라는 지역을 향하게 된다. 살해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며, 의문의 여성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된다. 조력자 여성이 말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고, 방관하는 것이 TV에서 제공되는 상징과 기호"라는 말에 반신반의 하지만,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어, 여성과 함께 한다. 그녀의 말에 따라, 이러한 상황을 만든 TV에 이상한(?) 전파를 쏘는 송신탑을 부수려고 행동한다.


여주인공 스킬레인과 조력자 여성은 결국 허술한(?) 경비를 뚫고 송신탑 안에서 이 둘을 그동안 좇던 자들과 쵱휘의 결전을 시작한다. 격투 끝에 총을 손에 쥐게 된 스킬레인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이때 터지는 꽃가루. 총알이 나간 것이 아니라 폭죽과 함께 꽃가루가 괴한들에게 날아간다. 이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 불태우려던 송신탑은 갑자기 분해(?)되고, 모양이 변경되어 하나의 작은 연극 무대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처음 낯선 방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스킬레인은 다시 의자에 묶이게 된다. 조력자인 줄 알았던 여성이 직접 스킬레인을 구속한다. 어떻게 된 것인가.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주인공 스킬레인이 총을 쐈는데 총알이 날아간 것이 아니라 꽃가루가 터졌다. 송신탑이었던 장소는 갑자기 연극 무대로 모습을 탈바꿈한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괘씸죄


사실은 이러했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의 여주인공 스킬레인은 실제로 흉악범죄를 저지른 살인마였다. 약혼자와 함께 아이를 유괴한 후, 끔찍하게 살인을 한 범죄자였다. 범죄 과정은 잔혹했다. 아이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아이의 시신을 불태웠고, 스킬레인은 이 과정을 카메라로 촬영하기까지 했다. 두 연인의 끔찍한 범행에 여론은 들끓었다. 같이 범행을 저지른 남자 친구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스킬레인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공범이 같은 선택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분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흉악 범죄자 스킬레인은 법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여론의 뭇매와 돌팔매를 맞게 된다. 방식은 가히 충격적이다. 여주인공 스킬레인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지워가며, 그녀가 끔찍한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한다. 전반부에 괴한이 총을 쏘고, 스킬레인이 공포에 휩싸여 도망을 치게 되고,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이 바로 첫 단추였다. 스킬레인 본인만 기억 못 할 뿐, 모든 것이 잘 짜인 한 편의 '쇼'였다.  


'화이트 베어'는 피해자의 고통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인 '화이트 베어'는 사실 송신탑이 위치해 있는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여주인공 스킬레인이 죽인 여자 아이의 인형이었다. 하얀색 곰 인형은 납치된 아이가 죽은 곳 근처에서 발견된 힌트이자, 유품이었다. 스킬레인이 등장하는 첫 부분 TV에 비친 이상한 기호와 괴한이 쓰고 있던 모자의 그림은 공범인 스킬레인의 약혼자가 목에 한 문신이었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중간중간 이러한 상징을 활용하여, 스킬레인이 잘못을 직접 말할 수 있는, 죄를 스스로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실마리로 활용한다. 당사자인 스킬레인만 모를 뿐이다. 스킬레인은 여러 기호를 보고 희망의 단서를 찾는 대신에, 분절된 기억 속으로 빠져, 계속해서 공포에 휩싸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절망에 빠지고, 자존감을 잃게 되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반복되게 된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데, 살해 위협은 반복되고, 작은 도움이 절실할 때, 사실상 스킬레인을 징벌하는 일원 중에 한 사람이 등장하여 의지하게 만든다. 일종의 '그루밍(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현상)'이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흉악범죄자의 기억을 조작, 반복되는 고통 속에 빠뜨린다.


그렇게 무한 반복된다. 스킬레인은 이 거대한 무대의 설계자인 인물에게 기억이 조작되고 지워지는 조치를 받게 된다. 잘 짜인 각본에 따라 동일한 인물과 상황, 결말이 주어짐에도 스킬레인은 앞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대신 스킬레인은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알게 돼, 끊임없는 고통 속으로 다시 빠지게 된다. 스킬레인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알고, 울부짖고, 용서를 구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킬레인의 울부짖음이 죽음 앞둔 사람의 진 모습인지, 순간의 위기를 탈피하고 싶은 행위인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시민들은 흉악범죄자를 징벌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에서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됐을까. 그 이유는 드라마에 잠깐 등장하는 흉악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 잔인하게 사람을 살해한 행위, 나아가 흉악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안/못 하는 현실 때문에 시민들은 분노한다. 이미 사법당국에 의해 징벌을 받았음에도 여론과 시민들은 이에 만족할 수도, 만족하지도 않는다. 사법부의 신뢰 여부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끔찍한 쇼를 준비한 가장 큰 원인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제도적 결함과 문제가 바로 그 바탕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이러한 모습과 상황은 최근 우리 사회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청와대 국민청원의 현주소를 볼 때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인 아동학대, 살인, 강간 등의 사건으로 온오프라인에서 분노하는 우리 사회 시민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를 보면, 이미 두 차례나 청와대와 사법부에서 입장을 발표했던 2008년 12월 경기 안산시에서 8세 여아를 강간, 상해를 입혔던 '조두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피해자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끔찍한 고통 속에 사는데, 가해자가 다시 일반사회로 활보할 수 있는 상황에 대중들이 항의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 술을 먹고 행동한 행위니 봐달라는 뻔뻔함, 이를 고려해 봐주는 우리 사법부와 법 체계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흉악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 속 시민들은 응징한다. 사법부의 조치에 만족을 하지 못하니, 시민이 직접 나서서 단죄한다. 이러한 상황은 헌법 위에 '괘씸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미 사법당국에 의해 조사와 수사, 처벌이 있었음에도, 그 결과와 조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시민들의 분위기와 모습을 대변한다. 이러한 시민들의 분노는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우리 사회 가장 약자인 아이에 대한 끔찍한 범죄였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도 되고 이해가 간다. 이 분노의 근원이 가해자 한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다음에 또 다른 아이가 희생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걱정 때문이기에 적절하면서 옳다고 생각한다. 



함무라비와 조두순 


하지만 시민이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는 것이 적절한가.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를 보면 찝찝한 무엇인가가 남는다. 드라마는 사법 절차를 넘어 가해자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매조짓는데, 이러한 방식은 함무라비 법전에 "만일 사람이 평민의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의 눈도 상해져야 한다"라는 법칙을 따르는 듯했다.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적용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직접 느낌으로서, 피해자와 그 유족의 심정을 느끼게 하는 그 방식 말이다. 


코 앞에 다가와 있다. 2020년 한국사회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조두순'이 출소한다. 우리 시민과 시민사회는 벌써부터 공포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조두순이 출소하는 날, 구치소에서 테러하자.", "성범죄자 신상공개를 통해 신상을 유포하자"는 분위기와 댓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이러한 의견 표현이 정점에 다 달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흉악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현재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공유되고 있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사법부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흉악범죄자를 응징하는 방식을 취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말이 있다. 동의가 되는 문장이다. 하지만, 흉악범죄만큼은 이 말에서 예외다. 아이 줄 분유가 없어서 분유통을 훔친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조두순과 같은 부류는 이 말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 약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자들의 경우 단순히 미워하는 것을 넘어 점점 더 분노를 치밀게 한다. 특히, 가해자가 반성하기는커녕 형을 감량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분노 그 이상을 드러내게 만든다. 술을 먹었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주취감경'이라는, 그러니깐 술을 마셔서 심신이 미약했으니 감경해 달라는 조두순의 태도를 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죄도 밉고 사람도 미워진다.



숙제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메시지를 던진다. 가해자인 스킬레인이 사법조치를 넘어, 시민들에 의해 처벌받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현재 '조두순'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갈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범죄자를 시민이 직접 처벌하는 방식을 통해, 흉악범죄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우리 사회에 물어보는 듯했다.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 할까.


쉽다. 시민과 시민사회가 나서서 드라마에서처럼 흉악범죄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쉬운 방식이다. '조두순'으로 대표되는 범죄자들을 공격하고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해자와 범죄자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은 손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한다. 드라마에서 보여 준 손쉬운 방법 대신, 우리 사회는 어려운 길로 가야 한다.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을 비난하고 위협, 처벌하는 데 앞장서는 대신에, 앞으로 동일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비록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고,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태까지 앞서 말한, 이러저러한 이유와 핑계로 제대로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법을 구체적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정확히 적용하지 못했기에, 조두순과 같은 흉악범죄자가 우리 사회와 시민들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사람들처럼 가해자를 겁주고, 고통을 주는 건 가해자가 피해자들에게 한 행위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방식이다. 흉악범죄자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인물과 상황이 되고 만다. 가해자에게 보복을 하는 순간,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여주인공 스킬레인은 사법 조치를 당하고, 여론의 돌팔매도 맞는다. 


악마와 싸울 때 제일 먼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싸우다가 그 악마처럼 되는 것을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시민들이 나서야 할 일은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법과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흉악범죄자 한 개인에게 죄를 묻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하게 다뤄야 하는 건, 적법을 통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이다. 유사한 흉악범죄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 사전에 예방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피해자와 그 유가족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절차와 제도를 확립하는 게 먼저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역으로 보여준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단순히 폭력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흉악범죄자에게 분노만 하는 것보다, 이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 사건 이후 피해자를 구제하는 더 나은 환경과 제도가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가해자에게 받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되돌려 주고, 끊임없이 아픔을 준다고 하여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피해자와 그 유족의 상처가 예전처럼 회복되지도 않는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 편은 분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생산적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흉악범죄가 포털 사이트 높은 순위에 거의 매일 배치되어 있고, 신문과 방송의 첫 꼭지로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 보호가 요구가 나날이 증가하는 현재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거울 같은 드라마다.


넷플릭스 'White Bear 화이트 베어'는 흉악범죄자에게 무한한 고통이 반복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브런치 X 넷플릭스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블랙 미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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