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 Aganist Fire 보이지 않는 사람들 편
군대는 한 마을에 '벌레'가 침입했다는 신고를 받게 된다. 이에 벌레를 소탕하기 위해 군 병력이 움직인다. 벌레는 다름 아닌,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괴물'로 불리는 벌레들은 마을의 곳간을 침범해 양식을 훔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장을 확인한 최첨단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이벌레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벌레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알려진 인물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찾아낸 사내와 사내의 집. 군은 결국 집안 구석구석을 찾던 끝에 벌레를 발견하고 이들을 소탕하기에 이른다.
군은 작전 과정에서 한 마리의 벌레를 놓쳤지만, 두 명의 벌레를 사살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런데 주인공 스트라이프는 이 과정에서 벌레들이 사용하는 이상한 빛(?)에 노출이 되고, 이후 이명과 환각 증세를 느끼겐 된다. 부지부식 간에, 훈련 도중에, 특히 잠을 자고 있을 때 더더욱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된다. 의료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게 되지만, 이상 증세는 사그라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러다 스트라이프는 다시 벌레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다. 하지만 그가 마주친 것은 벌레라고 불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가 마주한 벌레들은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료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유는 이러했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벌레라는 사람들은 '마스크'라는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체제는 편입되지 않은 인간들은 모두 괴물로 비추게 설정했다. 세상은 인간 대 괴물로, 적군과 아군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가 한몫을 거든다. 사람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도 모자라 대대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에 편견과 고정관념을 언론이 앞장 서서 심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마스크 시스템에 의해, 언론의 보도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분류하게 된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상대방을 억압한다.
그런데 운(運)이 따랐다. 작전에 투입됐던 스트라이프가 쬔 빛은 바로 이 등록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장치였다. '마스크' 시스템에 편입되는 거부, 또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물로 불리는 사람들이 만든 궁여지책이었다.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무참히 학살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타개책이었다. 스트라이프는 작전 도중에 이 빛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이명과 환각을 겪게 된 것은 이 시스템에 오류가 있음을 알려주는, 현재 상황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는 경고였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알려주는 빛.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넷플릭스 <Men Aganist Fire,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한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평소 보고 듣고, 말한 것들이 사실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제도와 체계가 사람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 만든 수단임을 말해 준다. 교육, 정치, 종교 등 이러한 시스템은 현재 우리 도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 잘못된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깨우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잊어버렸든, 잊혔든, 어느 순간부터 체화(體化)가 돼버려 우리의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니 분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할 수 도 없는 일임을 말해준다.
선택이었다. 결정이었다. 그리고 책임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니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마주하는 '삶'이라는 시스템은 주어진 현실이면서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었다. 넷플릭스 '보이지 않는 사람들' 편은 잘못된 시스템이든 잘 된 시스템이든,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태도를 꼬집는다.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무비판적으로 살 수 없음을, 삶과 결정에 있어서 부지부식 간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점을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함을 드러낸다.
모든 선택엔 그에 따르는 책임이 수반된다. 잘못된 결정이든, 잘 된 결정이든 그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과 처벌이 뒤따르게 된다. 넷플릭스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신병(新兵)으로 나오는 주인공 스트라이프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 대해,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나중에 지게 될 책임과 과오를 덜 수 있는 일임을, 남들은 나중에 고쳐 잡으려고 해도 너무 멀리가 바로잡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의 동료들이 시스템에 채 헛되게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과 그 시스템에서 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선임병의 모습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누구나 한 번쯤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그 갈림길에서 어떠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결정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누구나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때로는 크나 큰 기회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 넷플릭스 '보이지 않는 사람들' 편은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해 준다.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스트라이프는 '마스크'라는 시스템을 던져버리며, 결국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운이었을지언정,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주어진 운명(運命)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