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 캔과 철없는 남편의 심술

가족에서 나의 위치를 생각하다.

by 책 커피 그리고 삶


나는 고추 참치를 좋아한다. 고추 참치의 약간 매운맛과 참치 특유의 텁텁하면서 부드러운 살코기는 와이프가 없을 때, 내 밥상을 서럽지 않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몇 년 전 마트에 갔을 때, 이야기이다. 아내가 다른 물건들을 둘러볼 동안, 난 얼른 참치 캔이 진열된 곳으로 가서 고추 참치를 슬쩍 카트에 밀어 넣었다.


"OO 아빠, 그거 비싸.. 딴 거 살 것도 많은데... 그거(고추 참치) 좋은 말할 때, 빼라~"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초리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눈빛이다.


"그럼, 과자는 왜 사?"


"이건 딸내미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럼 내가 먹고 싶은 참치는 왜 안 사 줘?"


나는 참치 캔을 사수해야겠다는 묘한 의무감에 떼쓰는 아이처럼 신경질스럽게 반응하였다. 결국 참치 캔을 가져오는데, 성공했지만, 집으로 오는 내내 아파트 관리비, 도시가스비, 카드비 등 나갈 돈이 많다고 잔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다.


다음 날 퇴근할 때, 모든 욕망이 식욕에 집중되는 엄청난 배고픔을 느꼈고 참치의 맛난 양념을 상상하면서 입안에 군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급히 부엌에서 찬장을 열어 고추 참치를 찾았지만, 어제 사 왔던 참치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배고픈 아들한테 참치를 주었고, 아들이 폭풍 흡입했다는 소리를 듣자 화가 밀려 올라왔다. 순간,


"난 우리 집에서 뭐야?"


그 후 며칠 동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웃음만 나온다. 사랑하는 아들이 참치를 먹고 싶어 했고,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먹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아마, 그 순간 화가 난 이유는 가족의 서열에서 내가 생각하는 위치(최상위)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침해받았다고 생각되면, 화를 낸다. 김정운은 '에디톨로지'에서 이 경우를 공간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공간(위치)을 침해받았다고 표현한다.


김정운은 인류가 공간과 시간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포감을 느꼈고, 시간을 나누고 좌표를 숫자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통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인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나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참치 사건은 아마 내가 생각하는 정서적 공간에서 가족에서의 나의 위치를 찾지 못했고, 가족이 생각하는 나의 위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위치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현재 가족으로서 나의 위치(서열)는 맨 꼴찌 일지 모른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 운동회나 학예회에, 심지어 입학식에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별로 없던 것이다. 물론, 가끔 주말에 여행도 같이 가고 기념일도 챙겨주었지만, 추억으로 인한 정서적 공감이 생길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추억'을 이렇게 정의한다.

추억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많은 경험들로부터 발생하는 '정서'와 '기억'이다.


추억은 '정서'와 '기억'을 남기게 되고, '기억'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비슷한 장소, 시간, 경험, 분위기 등 특별한 자극에 의해 그 내용이 떠오르게 된다. 다만, '정서'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감'으로 변해 내면에 쌓이게 된다. 그리고 누적된 공감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다시 변화되어 우리 정서에 남게 된다. 그래서 평생 동안 쌓아온 가족 간의 사랑은 남녀 간의 호르몬적인 사랑과 다르게 보다 깊을 수밖에 없다.


나의 추억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학술적으로 '옳다', '틀리다' 상관없다. 그냥 내 생각이다.


아무튼 난 가족과의 추억이 부족하여 가족들의 위치(공간)에서 최상위를 차지할 만큼 공감이 쌓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가족에게 아빠의 존재는 '항상 바쁘고 그저 생활비를 벌어오는 존재?' 우리 애들에게 나의 존재가 그렇게 비칠지도 모른다. 그동안 목표지향적 삶을 살았던 나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반면 아내는 나보다 아이들을 우선으로 한다. 그만큼 아이들 간의 쌓인 추억과 공감이 많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당연히 서로 최상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족 간의 추억은 가족 구성원 존재 자체를 가치 있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존재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가 있다. 불치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아내는 그저 남편이 살아서 곁에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클 것이다. 이것은 가족 간의 강렬한 추억을 바탕으로 한 공감과 신뢰가 선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젯밤 밤늦게까지 트럭에서 음식을 팔고 있는 아저씨를 보면서, 저 분은 가족들에게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저분은 늦은 밤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가족과 지낼 시간이 부족할 텐데, 과연, 저분은 가족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그 아저씨의 자녀들은 늦은 밤까지 자지 않고 아빠가 양손에 들고 오는 피자와 치킨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피자와 치킨은 단지 먹는 것을 벗어나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아저씨는 나와 달리 다른 방식으로 가족들과 추억을 쌓고 있을지 모른다.


가족들 간의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에 따른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심란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가족 내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방법 중의 하나가 추억을 만드는 것이지만, 나는 서점에 가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 중점을 둔다.


아내는 주말마다 나 홀로 서울에 있는 서점에 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 물론 가족과 함께 갈 수 있지만,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 되니 가족과의 여행보다 친구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이가 어릴 때, 함께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느낌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때가 있나 보다.


하지만, 내 스스로 가족 내 현재 나의 위치에 대한 정당성을 찾아보았다. 나의 '자유'와 '가족 내 나의 위치'가 충돌되지 않는 방법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위치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위치가 아닐까? 김정운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 말하는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에 걸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최상위 위치가 되기 위한 억지스러운 자리다툼이나 지질한 권위가 아닌, 나의 가족 구성원들의 위치를 나보다 위에 올려놓는 것이 나의 방법이다.


김정운은 고독과 소외감으로 아주 쉽게 분노하고, 삐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우울한 단서들만 찾아내 괴로워하는 것을 '고약한 노인네 증후군'으로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가족 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