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에너지를 버리는 삶에 대한 생각
사람들마다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몇 가지 버킷리스트가 있을 것이다. 버킷리스트 자체가 반복되는 일상과 다른 특별한 경험 및 시선을 원하는 것이기에, 현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버킷리스트의 내용 중 하나로 '여행'을 포함시킨다.
'도쿄'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나 홀로 자유여행지'로 적당하였고 3달 전에 비행기 티켓과 숙박만 예약하였다. 그리고 여행 일정을 정하기 위해 도쿄 관련 책자를 하나 구입하였다.
'해외로 여행 가는 것이 뭐 어려울 것이 있겠느냐'라고 말할 수 있으나 '하늘이 무너질까'하고 걱정 많고 소심한 나에게는 끼니때마다 밥을 사 먹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말이 안 통해서 밥 못 먹고 다니면 어떡하지?"
"걱정 마.. 다 먹고 다니게 되어 있어. 도쿄에 가도 그냥 서울이야. 아마 실망할 걸? 맨날 서울에 가는 놈이 왜 그런 걱정을 해..?"
자유여행 경험이 많은 아내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약간의 불안 증세를 보이면서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는 나의 모습에 헛웃음을 치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출국 이전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출국 시간이 이른 아침이기 때문에, 전날 서울로 출발하였지만, 기차역에서 가방 손잡이가 빠진 것이다. 일단 임시 조치로 기차역 사무실에서 테이프와 노끈으로 보수를 하였지만, 여행 첫날부터 이게 뭐람..
이 뿐만 아니라 청량리에 도착하고 김포 공항 근처로 이동하는 중 전날 치과에서 임시로 금니를 해 놓은 곳이 떨어진 것이다.
'아~ 도쿄에서 내게 무슨 파란만장할 일이 생길 것이기에 출발 전에 이리도 방해하는가..'
일단 지하철에서 내려서 근처 치과에서 임시로 다시 붙이고 숙소로 향하였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설렘과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잠들어야만 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니, 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일단 숙소가 있는 신주쿠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관문인 지하철을 타야 했다.
"shinjuku, this way?"
이것이 도쿄에서 나의 첫마디였다.(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진심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본 말이다.)
지하철 안 무표정한 사람들, 남자 여자할 것 없이 하얀색 상의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모습들은 마치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서울 지하철에서 삶의 피로에 찌든 직장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하고 비슷하다니까.'
아내의 말이 떠오르며, 도쿄에서의 특별한 시선을 원했던 난 조금 실망감을 느꼈다.(그러나 이후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걸그룹에 중년의 아저씨들이 박자에 맞춰 소리를 지르고 마치 군대를 연상시키는 박수로 열광하는 모습에서 삶의 열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나라이던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열광을 하는 건 비슷한 거 같다.)
신주쿠에서 첫 번째 점심을 먹은 이후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미소 띤 얼굴과 손발 짓, 그리고 구글 번역기가 언어 문제를 대부분 해결해 주었고,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I can't speak Janpanes' 란 말이 모든 상황을 마무리해 주었다. 예를 들어, 길을 묻는 나에게 일본어로 설명하다가 알아듣지 못하니, 가까운 거리는 그 장소까지 같이 가주는 일본 여성들이 많았다.(나도 남자라 그런지 여성들에게 많이 길을 물어보았다.)
구글 지도, 번역기, 책자를 활용해 목표한 지점까지 도착할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마치, 한 가지씩 관문을 통과하는 의식처럼, 이런 성취감이 하루 10시간 이상 걷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이끌어 냈다.
신주쿠와 시부야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은 매일 밤 일탈을 통한 해방감을 꿈꾸게 만들고, 밀려드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런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잔의 맥주였다.
홀로 하는 여행은 나의 시선과 분위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기에 외롭고 힘들다. 여행하는 5일 동안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 그리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토록 원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책과 헬스는 평소 일상에서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불안정한 기분을 극복하게 하는데,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한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일까?'
결국 난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기에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언제든지 조건만 갖춰진다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동안 좋은 책을 읽고 특별한 경험을 통해 생각이 많아지고,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실제로 많은 부분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헬스나 독서는 에너지를 쏟는 대상이 변경되는 것이지, 에너지 자체를 비우고 새롭게 채우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변화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욕심으로 변질되고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시 올 것이다. 그저 에너지를 쏟는 대상만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다.
삶에서 가끔은 모든 에너지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과 나 자신조차도 버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번 여행이 삶에서 좀 더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나의 에너지를 버리는 시간이어야 했다.
그래야 다시 새롭게 채울 수 있다. 주스에 물을 타면, 맛만 없어지지 내가 원하는 물로 바뀌어지지 않는다. 주스를 버리고 콜라로 다시 채워야 콜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의미있는 채움을 위한 버림이 필요한 것이다.
문득 최근 읽었던 조조 모예스의 'After You'란 책의 문구가 생각난다.
.. 이건 꼭 쳇바퀴를 도는 것 같아. 아직도 쓰레기 같은 일을 하고 있어. 여기가 집처럼 느껴질 것 같지도 않은데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고 죽을 뻔한 경험도 했지만 지혜도, 삶에 대한 감사도 생긴 것 같지는 않아... 그래도 아무런 진전은 없어.
... 대답은 하나뿐이에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요. 그러니 뭐든지 닥치는 대로 몸을 던지고 멍드는 건 걱정하지 말아요.
결국.. 난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에너지를 쏟는 대상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에너지 혹은 욕심이 형태를 바꾸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채우기 위해 버리자. 다시 채워질지라도 여전히 나로서 존재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라는 필터로 인해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묻는다.
"바뀌고 싶니? 그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도록 진심으로 비울 수 있니?"
P.S. 문제가 되었던 가방은 여행기간 내내 무사히 잘 견뎌 주었고 집에 오자마자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