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이 공허함을 채워주지 않는다

전화번호를 정리하며..

by 책 커피 그리고 삶

나른한 주말 오후,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을 때, 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을 훑어본다.


'전화할 사람이 없다.'


내 폰 속에 200명이 넘는 사람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일을 털어놓을만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냥 적당히 친한 사람에게 전화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날은 기능을 멈춰버린 뇌처럼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막막하다.


'공허하다.'


그냥 목소리를 통해 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통해 공허함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아주 편하게 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의 손가락 수만큼도 되지 않는다. 또한 내가 원하는 시간에 그 사람들과 통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화번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은 내 마음속 각각의 등급에 속해 있다. '업무적인 이야기만 가능한 등급', '마음을 약간 오픈할 수 있는 등급', '생각과 마음을 오픈할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가리는 등급', '완전히 나를 오픈하여 나의 과오를 말할 수 있는 등급', 대략 이런 식으로 등급을 설정하고 사람들을 그 안에 채워 넣는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무의식적으로, 사람마다 나의 마음을 오픈할 수 있는 수준을 정하는 것 같다. 오해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며, 그에 따라 관리하는 방식을 매우 싫어한다.


내 마음의 등급은 단지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이야기가 나에게 상처로 돌아오는 경험을 통해,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본능이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내 마음속의 등급을 초월하여 다가가면, 당연히 상대방도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등급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된다. 예전에는 나를 완전히 오픈했지만, 점점 낯설어지는 등급으로 이동하거나 업무적으로 대했던 사람에게 어느 순간 마음을 오픈하기도 한다.(난 이것을 '인연'의 일종으로 표현한다.)




수많은 목록 중, 한 사람에게 통화를 시도한다. 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있었던 나의 고민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상대방은 자신의 생각만 말하면서 나와 공감하려고 한다. 난 그저 고해성사를 하듯 무심히 털어놓는다.


한 동안의 수다는 답답했던 마음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기 위안을 삼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대방을 통해 알게 되고 위로받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인생은 독고다이(특공대)'인 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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