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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Jan 19. 2018

행복론

캘리그라피: @mira77_life(인스타그램)

맞다. 우는 소리 크다고 더 아픈 거 아니다. 숨 죽여 울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깜깜한 새벽을 나와 당신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우린 고통 속에서도 살기 위하여 살아간다. 태어나기 위해 태어난 이후 오로지 살기 위하여 산다. 생존을 위하여, 멋지게 뒹구는 게 오늘이다. 지금이다. 내 삶이다.

밤새 울다 지쳐서, 정작 날이 밝으면 눈 감고 싶은 이들이 있다. 날 밝았다고 소리쳐 울어댈 기운조차 없다. 그런 이에게 아침은 환한 밤일뿐. 하루의 시작이 아니다. 그는 뒤이어 의문이 떠오른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제 그 사람은 나보다 덜 아파 보인다. 꽤 괜찮아 보인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다. 과연, 정말 그럴까?
그 속은 누구도 모르는 거다. 타인의 겉모습을 장담하지 말자. 오히려 남보다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상처로 아픈 거, 실패, 후회 모두 누구나 등에 짊어지는 평생 각자의 등껍질 같은 거다. 완전히 성숙하지 않으면 완전히 벗겨지지 않는 허물과 같다. 이건 원치 않아도 내 생에 끝까지 간다. 어디 내다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쭉 함께 가야 한다. 부끄럽게 성숙하는 과정 속에서 허물을 벗는 고통은 늘 함께이다. 그저 그 고통을 통달한 이들이 연연하지 않을 뿐이다. 연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타인의 고통까지도 이해하기에 이른다.

자, 기왕이면 더 멋지게 성숙하자. 더 멋지게 실패하고 후회하자. 연연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상처받아 아픈 것도 살아있어 사랑했으니까 가능한 거다. 자꾸 아파해서 어리석다는 게 아니라, 고통의 블랙홀에 빠지지 말자는 거다.

태어남의 목적을 달성한 후 우린 살기 위하여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나름 치열하게 사니까 그 속에 행복도 있는 거다. (노동의 본질이 월급이 아닌 것처럼) 근데 이 치열함은 누군가의 강요나 돈 때문에 생기는 거 말고, 그냥 노는 것도 아픈 것도 쉬는 것도 자발적이고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의 치열함을 말한다. 원래 노예는 억울하고 주인은 치열하다.
누군가는 태어난 이후의 삶을 소풍이라 했고, 누군가는 인생을 산책이나 보너스 게임이라 했다. 꽃은 단지 피기 위해 피어났을 뿐인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란 거다.

소풍과 산책을 치열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존을 위한 모든 행동 그 자체의 치열함을 인정하며 스스로 다독이고 안아주라는 것이다. 피어난 이후 꽃은 온갖 시련을 견디고 결국 언젠간 진다. 가끔 따뜻한 햇살과 바람, 간혹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지기 위해 피어나는 꽃이 없음을 알자. 그럼 나만 이 세상에 덜렁 놓아진 것이 아니란 걸 금세 깨달을지 모르겠다.

이 세상 모든 이의 그저 살아있음에, 그 치열함에, 공감과 연민이 피어날 것이다.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손을 내밀 수도 있고 기꺼이 베풀 수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에 소소한 행복이 숨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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