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Aug 11. 2018

이생망에 대하여

죽고 싶을 때 읽는 글

나는 합리적으로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래서 나의 종교관도 존중받길 바란다.(지금에 국한된 개인적 생각일뿐 훗날 얼마든지 수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강요하는 순간 그 종교관은 배척 1순위 대상이 된다- 참고로 현재 우리집은 개신교식 제사를 지낸다.)


나는 죽으면 '무(無)'의 상태라고 믿는다. 천국이나 다음 생, 사후세계의 심판이나 영혼 같은 건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승부를 보려면 이번 생에서만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최선을 다해 쉬고 최선을 다해 웃고 최선을 다해 의사를 표현하고 사랑하고 함께하고 또 즐기며 일하는 것이 내가 이 생을 잘 사는 미션이라고 믿는다. 아직은 죽음이 두렵기보다는 추하게 늙음이 두렵다.(모든 늙어감이 추하다는 게 아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거나 하늘에 계신 신의 곁으로 하루빨리 가고 싶다거나 지옥이 아닌 천국을 꼭 갈 것이란 생각으로 내 지금 삶을 임하진 않는다. 내 삶에 천사와 악마 역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인간의 규정과 착시에 불과하다.

선과 악은 있으나 그건 살아있는 모두에게 있는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선만 있는 사람도 악만 있는 사람도 없다. 악과 차악, 선과 차선이 혼재해 있을 뿐. '악(惡')역시도 상대적 기준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더 많다. 천국과 지옥 역시 저승이 아닌 이승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 하루만 해도 크고 작은 천국과 지옥을 맛본다. 또한 천국과 지옥은 똑 쪼개지는 두 갈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잘게 나뉜다. 거기엔 행복한 지옥도 있고 불행한 천국도 있다. 분명 환경은 천국인데, (불행한 이유는)상대적 박탈감에 혹은 타이밍 때문에, 어떤 조건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지옥일 수도 있고, 누구라도 불행하게 여길만한 것이 실은 나에게 행복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오래 사는 것이 행복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속 편하지만 세상의 불평등 때문에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부자들 중에도 마음은 매일 매 순간 지옥 안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흑백논리로 나눌 수 있는 형태의 것이 아니란 거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는 '신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 안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난 기도를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모시기 위하여 인내하는 선과 악을 다스리는 행위로써 명상의 일부라고 본다.

이번 생과 다음 생을 나누기 전에, 이번 생에서 다시 승부를 봐야 한다. 기도는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이다. 끊임없이 이 생에서 기도하며 수양해야 한다. 특정 신을 모시는 것만이 종교가 아니라, 내가 목숨을 바쳐 믿는 것이 (상징적 의미에서)종교이다. 아무리 시련이 닥쳐도 절대 재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을 다해 어떻게든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를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숨만 붙은 채로 죽은 생이다. 적어도 나는 이런 신앙과 정신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까? 말까? 결정해야 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