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Oct 24. 2019

우린 왜 글쓰기를 하고 싶은가

바야흐로 글쓰기의 시대가 왔다.

새삼스럽다. 글이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용이 예비된 기능적 도구인데, 왜 2017년 즈음부터 급속도로 글쓰기 강좌와 책이 쏟아져 나와 지금까지계속 바람이 는 걸까? 나는 이걸 몇 가지 각도로 분석해보았다. 오랜 기간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한 건 아닌 나름의 분석일 뿐이니 하나의 화두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연설문을 못 쓰는 대통령

연설문을 못 썼던 이유가 박 대통령의 글쓰기 역량 부족 탓인지, 최 씨 아줌마의 권력 농단 때문이었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여러 정황상 직접 글쓰기를 못했을 확률을 높게 보지만, 원래 대통령에게는 연설비서관도 있고 핵심 간부들도 있으니 글만 쓰고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보조를 받아 최종 결정권자로서 활약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팩트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연설문을 '못 썼다'는 점이다. 보조를 받는다는 건 다시 말해, 일을 주도하는 역할과 책임이 보조받는 리더에게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진보 보수의 이념 논리를 떠나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설문에 들인 공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주요 연설문이 강남 최 씨 아줌마의 글발인 게 밝혀지자, 국민들의 촛불은 무섭게 타올랐다. 이내 국가의 헌법은 부끄러운 국가지도자를 곧바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난 이때 국민들의 열망에 자리 잡은 집단무의식 중 하나가 이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소속한 나라의 대표가 자신의 생각 하나 스스로 글로 써내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 순간, 이런 무능함을 떠올렸을 때 무시할 수 없는 동일시의 감정을 국민들은 느낀 게 아닐까. '근데 나도 글은 잘 못 쓰는데...' 하는 두려움 말이다. 비판은 하고 있지만 내가 조직의 리더, 가정의 리더 혹은 내 삶의 리더로서 글쓰기 역량이 부족하다면 나도 '무능한 리더'인 건 아닐까 하는 양가감정. 내 생각이 너무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이후 글쓰기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이러한깊은 내면의 니즈와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역사적인 순간의 중심에는 '글쓰기'가 있었다고.  



승진이나 연봉보다 성장과 성숙을 꿈꾸는 개인주의자(=업글인간)

나는 <퇴사학교>라는 곳에서 글쓰기 정기 강좌 <나를 발견하는 30일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독립해 내가 일하는 현장은 떠나왔지만, 간접적으로 직장인들을 매주 마주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솔직한 사연과 현장감이 생생한 글들을 매일 읽어 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아 성찰의 도구로써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4회 수업에 29만 원이나 기꺼이 지불했다는 것, 매일 글쓰기에 도전하고 실행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개인의 성장과 성숙이 승진이나 연봉보다 더 중요시되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라는 것이다.


물론 밀레니얼 세대가 아닌 수강생도 더러 온다. 그들이 퇴사학교 글쓰기 수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는 밀레니얼 세대와 거의 같다. 모두 꿈(자아실현)을 좇는 어른이들. '당장 책을 내고 싶다'나 '작가가 되겠다' 보다는 먼저 진짜 '나'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이 직장생활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과연 살아남을 인간인지까지도 말이다.


얼마나 멋진 동기인가. 남이 말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나를 글을 통해 마주한다는 작업이, 가히 경이롭기까지 하다. 삶의 본질을 폭포수 앞 바위나 보리수나무 앞에서도 떠올릴 수 있지만, 퇴사학교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입증하는 그들이다.


그러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 음 지금 내겐 월급쟁이가 최고군 하는 결론도 많이 내려진다. 퇴사학교 수업을 다 마치고 회사에 더 열심히 다니는 현실주의자가 통계상 더 많다는 자체 설문결과도 있다. 그래도 나는 회사로 돌아간 이들이 평범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그 과정에 뛰어들었었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라고 본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떤 나라에 사람 안락사(일명 조력자살)를 허용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여기는 결코 쉽지 않은 면접 등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합법적 자살을 돕고 있는 곳이다. 알려진 사례로는 이미 불치병에 걸려 고통 속에서 연명하는 이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는 아름답게 꾸며진 방 안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모든 사례자가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니다)


그런데 그 기관에는 이상하게도 총 3가지 종류의 파일이 있다. 하나는 최종 면접에 통과해 안락사가 결정되어 날짜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빨간색 파일, 다른 하나는 불합격(?)해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파란색 파일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가 가는데 마지막 하얀색 파일이 의아하다. 바로 최종 면접에 '통과한 후에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파일이란다.


그들은 왜 돌아간 것일까?

그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음'을 깨닫고는 일상으로 돌아가 더 열심히 살아가는 유형분류되었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이런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퇴사학교에서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음을 깨닫고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것이 조직을 위한 희생 따위가 아니라 개인의 성장을 위한 선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 그것을 글쓰기라는 도구로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음을 비우면 본질이 보인다. 이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선택이 아니라, 이렇게 살 것인가 저렇게 살 것인가의 성숙한 유가 필요한 이유이다.




강의록으로 보기

<<너도 작가가 될 수 있어>> 책 베스트셀러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취미로 하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