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잔근육의 미세한 떨림을 보며, 나는 돌연 강사 모드로 태세를 전환한다.
- 글을 잘 쓴다는 게 과연 뭘까요?
역시 바로 답하기 난감할 때(분위기 전환용 말 바꾸기를 할 때에는) 되묻기만 한 게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걸 일찌감치 깨달았던 게 분명하다. 자신도 명징하게 알지 못할 때 상대에게 물음으로써 힌트를 얻어 슬쩍 넘어갔던 거. 상대가 스스로 깨닫는 모습에 ‘오호라 옳타쿠나’ 한 게 문답법(산파술)으로 유산처럼 남겨진 게 아닐까.
응 아니야.
나는 다시 그 수강생에게 한 명의 글쓰기 강사로서 말한다.
- '글을 잘 쓴다'라고 말하는 전제에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틀 안에 갇히는 게 아닐까 해요.
처음부터 잘 쓰려고 애쓰지 마시고, 우선 내 생각을 정확하게 문장화(문장으로 옮겨내는 작업)하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다음 객관화(고치고 다듬기 위해 독자 입장에서 보는 작업)를 해보세요. 그럼 정확하고 친절한 글을 쓰게 됩니다.
글쓰기는 감각의 영역에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잘 쓴 글'은 점점 완성될 거예요. 계산된 기획이 아니라 따르는 보상으로 말입니다.
수강생은 무릎을 탁 쳤다. 어쩐지 내 수강생들 무릎은 전부 남아나질 않는 것 같다.
글쓰기 강사인 나는 가끔 글을 잘 쓴단 생각보단 말을 기가 막히게 즉흥으로 잘 둘러대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말로 드립력이 상급이다.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기지나 위트가 썩 나쁘지 않은 것으로 우연히 문장을 줄줄 만들어내고 그걸 엮은 온라인 글과 책 덕분에 작가란 말을 듣게 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난 언제부터 말을 이렇게 잘했던 걸까. (급전환)
초등학생 1학년 시절, 교실 뒤편 사물함이 떠오른다. 자기 번호가 쓰여있는 사물함에 의무적으로 붙여야 했던 ‘나의 소개’.
그 네모나고 희던 자기소개 딱지에는 정말 ‘나는 누구인가’를 담은 항목이 이것뿐인 걸까 하고 그 어린 나이에도 절망스러웠던 질문들. 다음과 같은단어로 박제되어 있었다.
이름, 본관, 특기, 취미, 장래희망...
본관란 옆에 가문을 쓰라고 칸이 따로 있었다. 전주 이 씨 가문에 ‘나 왕족양반 집안이야’하는 익안대군파(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의) 21대손이라는 초딩의 유일한 스펙을 떡하니 써놓았다. 난 지금도 이에 감흥이 없지만, 아빠는 내심 뿌듯해하셨으리라.(우리 집안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우리 집안도 안 찍는 피닉제 이인제인 건 비밀)
대망의 특기란.
‘말을 조리 있게 잘함’이라고 엄마궁서체로 쓰여 있었다. 이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이 난다. 이유는 이 ‘나의 소개’가 거의 초등학교 4학년까지도 사물함에 붙어 있었던 점. 거기에 ‘내가 말을 잘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한순간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선 내 생각을 단 한 마디도 표출하지 않고서 한 달 내내 침묵으로 버틴 적도 잦았다. 엄마는 그런 내가 집에서 다 쏟아붓고 까불거리니까 말을 곧잘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 영향은 엄마가 어릴 적부터 소리 내 읽어준 책 덕분이라면서, 그때 엄마는 꽤 뿌듯해하셨다. 세어보니 정확히 지금의 내 나이와 같은 그때의 엄마였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장래희망'
장래희망은 1 지망 : 변호사(엄마의 바람)
2 지망 : 만화가(나의 바람)이었다.
엄마는 일관된 분이셨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니까 변호사를 하거라 하는 기가 막힌 논리였다. 어린 동영은 혼자 중얼거렸다. 엄마가 더 조리 있는데 왜 변호사를 안 하시지?
우리는 이쯤에서 2 지망에 주목해야 한다. 만. 화. 가.
이동영 작가가 만화도 그리나? 그렇다. 어렸을 적에 꽤나 잘 그렸다.(전국만화경시대회에 학교대표 출전경험이 있다)지금은 아예 안 그리지만 솜씨가 아주 죽은 편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솜씨만은 감각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한다. 다만 나는 그림보다 이야기 만드는 일에 더 충실했다. 어린 동영이가 학교에서 한 달 동안 말 한마디 안 하고 버텼던 이유는 선생님의 차별과 아이들의 따돌림, 방관 따위가 이유였는데, 그로부터 생긴 문제를 승화할 도구가 생긴 것이다.
내가 자유로이 창조한 만화 속 세계에서는 각종 메타포(은유)를 통해 그들에게 복수할 수가 있었다. 내 만화는 '에잇 빙신들(8명의 얼음신들)', '세븐(7인의) 전사들'처럼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나로 투영되는 주인공의 친구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지켜주고 사랑하는 스토리였다.
사실 디테일한 화풍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의 유려함보다는 말주머니 속 대사의 힘으로 만화를 전개해나갔다. 캐릭터와 캐릭터 간의 대화는 나의 둘도 없는 해방구였다. 그래,비상구였다.(이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을 살아가기에 현실을 잊기가 벅찼던 어린 동영이는 만화 속 세계에서, 꿈속에서, 또 가상의 인물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건 다름 아닌 '생각'이었다.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질문을 많이 했고, 학습만화책도 많이 읽었다. 자연히 일반적인 그 또래의 생각은 거의 하질 않았다. 상상력과 지식은 뛰어난데 너무 앞서가니 소통은 어렵고 엉뚱하게 보여 비현실적이었던 것. 따돌림은 계속되었다.
만화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독자가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자기만족에만 그치는 건 표현 도구로서 가치가 무의미해질 뿐이다. 당시 초등학생 주제에 야한 그림을 기가 막히게 그리는 같은 반 아이가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르는 예비 독자를 다 사로잡았다. 깨달음이 오기를 사람들은 자극을 좋아하는구나 해서 공포나 죽음을 소재로 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다. 대사가 너무 리얼했기 때문이다.
영화 '리얼' 중
내가 만화 대신말을 했다면? 즉흥적이고 소심한 비언어가 다 비치니엉뚱한 생각들만 가득하고 일반적인 생각은 텅 비었다는 게 들통났을 것이다. 교회 같은 곳에선 나를 생각한다는 듯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 동영이는 말이야. 생각이 너무 많은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 만화도 글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꼭 말로만 표현해야 하는 건 아닌 것인데, 그들은 그런 일차원적이고 유아적인 발상으로 나를 평가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