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냥’이란, 사전적 의미로 ‘스스로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나 ‘지니고 있는 힘의 정도로써 일을 해낼 만한 능력’을 말한다. ‘대통령감’이다-라고 할 때 그 ‘감’이 깜의 원말이라 한다.
난 아주 가끔 내 자존감의 정도와는 무관하게(아니 자존감이 높아서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자기 객관화를 하여 ‘내가 깜냥이 안 되는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방금 문득 스친 생각은, ‘내가 TV에 나올 깜냥이 안 되는구나.’였다.
이게 건전한 객관화가 되려면 절대적인 기준이 있거나 내 과거와 비교해야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상대적인 동기로부터 시작한 발상이었다. 굳이 누군지는 밝히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나처럼 ‘작가’이고, ‘글쓰기’를 강의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팩트만 일러두겠다.
그는 ‘진심’으로 글쓰기를 해서 잘 통했다. 우연히 인문 잡지를 들춰보다가 그에 대한 평이 나왔고, 최근 내가 주최하여 온라인으로 하는 글쓰기 모임(글쓰기 메이트)에서도 몇 멤버가 콕 집어 그에 대한 평이 있었다. 둘 다 호평이었다.
작년 코로나 시국에 잠시 만났던 친구가 있다. 내 작가 이미지가 버프로 작용한 덕에 만남이 성사됐었다. 이별할 조짐이 보일 즈음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작가라는 왕관(?)을 공식적으로 쓰려거든 ‘세바시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그녀가 날 매력 있는 작가 이미지로 본 건 맞지만 한낱 '무명작가'로 인식한 그의 가치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사였다. 나를 나로서 바라보지 않는 그의 시선이 싫어서 이별을 결심한 건 그때였으리라.
아니 근데, 으응? 세바시에 나가는 게 어려운가?
어렵진 않지만 쉽지도 않다. 일단 내가 나가고 싶은 열정만 있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고, 설사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세바시 무대에 서는 일이) 내 안에 타오르는 흥미로 좀처럼 이어지지 않아서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는 몰랐다.
지금 시점에선 이미 헤어진 친구가 요상한 프레임 안에 날 가둔 말이어서 무시해도 무관한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존심이 살짝 상할 뻔한 것이, 내가 공식석상에 나갈 깜냥이 되는데도 나가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과, 내 깜냥의 ‘한계’로 할 수 없이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 흥미도 없는 일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된다니. 난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데. 괜한 짜증이 밀려오려던 참에 '필요하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모 역사 분야 강사와 같은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아까 떠올린 그 작가 겸 글쓰기 강사만큼은(그는 세바시에 나온 바 있다) 내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스윗스팟 설정의 희망고문.
이렇게 말하면 들킬지도 모르겠으나 그 작가분은 나보다 어린 사람이다. 지금은 이 분야 사람이 아니라도 많이 아는 셀럽이 되었다. 예능 같은 곳에도 나온다. 역시 나이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보다 확실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색깔이 명확해 개성도 있어 보인다. 자신감도 보인다. 많은 사람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고,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난 아마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만큼 그는 자기 깜냥대로 잘해내는 중이다. 누가 보아도 공식석상 데뷔와 적응에 성공했다.
이건 자존감이나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의 문제다. 내가 못나진 않았지만 그리 잘나지도 않았으며, 실력이 없지는 않지만 실력이 월등하지도 않기에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사람의 반도 노력하지 않았다. 지금껏 하고 싶은 대로 운 따라 길 따라 즐겨 왔을 뿐 추가로 애쓰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하고 싶으면 했고, 하기 싫으면 외면했었다.
주체적으로 사는 건 어떤 면에선 좋으나 이면의 그림자도 있다. 선택이 잦으니 한계가 그어졌다. 몰랐다.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난 진짜 몰랐다. 혹시, TV와 세바시 등 공개 매체에 나온 그 작가 겸 글쓰기 강사를 보며 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건가?
음, 완전히 그런 감정은 또 아니다. 가장 가깝게 말하면 ‘반성’의 감정이 크다 하겠다. 내가 그동안 해온 방식대로 계속하면 공식석상에 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어떨까? 한창 부정이슈가 있었던 모 셀럽 역사 강사의 반의 반도 못 버티고 말 일이란 걸 스스로 잘 안다.
강의를 하는 사람이 공식 발언대에 서면 부작용이 꽤나 크다. 비공식적인 플랫폼에서는 레퍼토리를 조금씩만 바꿔서 소위 ‘재탕’하면서 현장에 맞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공식적인 플랫폼에서는 레퍼토리가 반복되면 ‘또 그 소리’가 된다. 바로 ‘역량의 한계'내지는 '바닥난 콘텐츠’로 비치기가 쉽다.
본질을 꿰뚫거나 시대를 주도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웬만한 경우엔 피로도가 크다. 그러다 보니 무리수를 두는 강사들이 팩트체크나 뒷조사(?)를 당하면 속절없이 당하는 거다.
이론만 읊는 학자가 아니고, 공개 매체에서 원하는 모델인 '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터'로서는 어느 정도 콘텐츠를 포장해가며 유연하게 바꾸는 일이 대중과의 소통에서 무게감을 낮추는 행위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것이 반복되는 동시에 그 사람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 폭발하는 이들에 있다. 언젠가 내가 그런 사태에 노출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다. 왜 굳이. 아직 시작도 안 했는 걸.(도리도리)
공식석상에 나갈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나름 올해로 8년 차 강사에 몇 권의 책을 냈고, 찐팬인 독자와 수강생(제자들)도 자체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마케터 출신으로 퍼스널브랜딩도 나름 잘하고 포털에 검색 노출도 곧잘 되는 나다. 나야나.
섭외하는 담당 작가나 판을 깔고 기획하는 PD 입장에서 내가 후보로 거론되는 건 사실 자연스럽다. 실제 거절한 적도 물론 있다. 항상 그 이유는 ‘깜냥’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방송 한 번 탄다고 대박이 날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운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노출의 기회가 정식으로 왔을 때, 내가 어떤 이미지로 비칠지를 생각한다. 아니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영화배우가 외적인 아우라와 그간의 필모그래피로 자신의 상품 가치를 증명하듯, 작가인 나도 증명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
반전매력이든 정면돌파든 대중에게 비치는 내 이미지를 아는 것은 공식적인 무대에 설 때 매우 중요한 활용요소가 된다. 이동영이 이동영으로서 자존하여 브랜드가 되고, 콘텐츠가 되며, 심벌이 되어야 지지받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럴만한 '깜냥'이 되는가?
아니다. 내가 PD나 작가라면 나를 어떻게 기획하고 편집할까? 아쉽다. 몇 %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나름 방송작가아카데미 출신의 감이다)
내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록)에 적힌 꿈 중 하나가 ‘지상파 라디오 DJ’인데, 아까 언급한 그 작가 겸 글쓰기 강사는 DJ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내 롤모델도 아닌데 자꾸 의식이 되는 건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이미 잘 가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것도 그가 자원하거나 의도해서가 아니라, 시대와 대중이 그를 불러냈기에(정치인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데 그건 운의 흐름도 좋아야 하겠지만 ‘깜냥’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그가 조금 부럽다. (부러운 것 같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 하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가능하면 피하라고 글쓰기 수업에서 말하는 내가 그렇게 쓰는 게 싫어서 그냥 ‘부럽다’라고 썼다.)
졸라 많이 부러운 건 또 아니지만, 부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나는 이길 생각도 질 생각도 없다. 비길 생각도 없으니 그가 내 라이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전에 내가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부러운데 마냥 가만히 있으면 지는 거다.’
나는 오늘부터 내 깜냥을 업그레이드 및 업데이트할 생각이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부러워하도록.
모 유튜브 채널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그것도 내가 이긴 것'이라는 궤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농담 섞인 합리화 말고, 진짜 진검승부를 벌이고 싶다. 그 상대인 작가 겸 글쓰기 강사는 어제의 이동영 되시겠다. 깨끗하게 승부를 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