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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Jul 09. 2022

에세이 글은 위험해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비교로 나란 인간이 드러나 이미지로 새겨지니까

에세이를 쓰는 일은 나에게 손해다. 난 글을 쓸 때 솔직한 편이고 에세이 글은 진솔해야만 하는데, 그게 문제다. 드러나는 것은 들통이 난다는 것.

글 속에서 해석의 여지 다분한 치부가 드러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이미지는 내 전문분야(강의)와 별개로 잔상이 남아 독자에게 새겨지기 때문이다.


실은 누구도 나를 오래,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난 그래서 더 두렵다. 한번 규정된 이미지는 회복이 어려우니까. 쉬운 말로 말해 수강생들에게 편견이 박혀 버린다. 다행한 일이라면 많은 수강생들이 내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다는 점인데, 그건 좀 나는 땡큐입니다.

무엇이 드러남은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이라 한다. 가짜를 판별하기 위해선 진짜를 많이 접하며 안목을 키우는 것처럼.


언어학자 소쉬르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통해 이렇게 설명한다.

'친구를 멋쟁이라고 부를 때 멋쟁이라는 말 자체에는 ‘감각적으로 옷을 잘 입고 멋을 잘 내는 사람’이라는 가치가 이미 부여된 것이 아니라, ‘못난이’ 같은 말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지과학자인 더글라스 호프스테터는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우리 인간은 비교를 통해 이해하고, 비유하고 유추하며 사고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비교를 통해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깨닫게 된 나르시시즘적인 내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에세이스러운 서사로 기록해 책을 낸다면 내 이미지는 그대로 박제돼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방금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게 아니지만 이미 독자의 머릿속엔 자극이 일어나 비교하기 좋은 키워드가 있다. '나르시시즘'

해당 키워드를 독자가 접한 순간, 이 글을 쓴 이동영이라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규정한다. 글에서 발굴·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겪었거나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나르시시즘과 비교해서 유추하고 결국 규정하는 거다. 나르시시즘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가나 강사 비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독자 앞에 드러나 버린 이동영은 더 이상 이 글을 읽기 전에 떠올린 이동영 작가가 아닌 게 돼 버린다. 속 깊은 일상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터 놓으려거든 성숙도가 더 높아져 경지에 이르거나 (나이를 더 먹고 깨달음의 연속으로 세상을 달관한다던지) 사람들 앞에서 퍼스널 브랜딩이랍시고 전문분야 강의하는 일을 멈추거나 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 몇 년 사이 나에게 다가온 인연들은 이동영의 민낯을 수용하기보다는 이동영 작가(강사)의 이미지로 관계의 지속을 기대하곤 했다. 그때마다 난 실망을 안겨 주었다.  


가면을 쓴다는 것에 너무 가식이라고 치를 떨 필요가 없었는데, 그동안 나는 노력하기 싫어서 호들갑을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이고 자기 객관화로 미약하게나마 성숙해 가는 요즘. 아직은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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