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디오 대본을 준비하는 바탕엔 그간의 10년 차 글쓰기 강의 짬바, 글을 쓰며 겪고 쌓은 경험적 노하우, 몇몇 단행본과 웹 검색 등의 영향으로 정리된 '뇌피셜'이 다였다.
6회분을 그렇게 녹음 후 방송에 내보내고서 나는 내 지식과 통찰의 깊이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천착하게 됐다.
영상(음성)으로 남지 않는 강의에서는 커리큘럼과 레퍼토리대로 반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책을 출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자기 복제가 곧 강사(저자)의 한계와 함께 정체되어 있는 수준을 방증한다. 그걸 알았다.
대안이 필요했다. 이대로 1년은커녕 반년도 못 가 내 콘텐츠가 빙빙 돌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학습동기가 일었다.
최근에 대학원 동기샘들과 논문 스터디를 2회 실시했다. 지난 1학기 동안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였던 논문이 스터디를 하면서 갑자기 읽히기 시작했다.
졸업 논문을 쓰려면 아직 4학기나 남았기에 선배나 교수는 다소 이른 논문 스터디가 오버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석사과정 수준의 수업의 근간은 기본적으로 논문을 찾아 읽을 정도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일상에서부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 이야기하는지가이전과 달라진다는 말과 같았다.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은 학위 취득을 위해 졸업을 향해 달리고 인맥을 쌓기 위함도 중요하며 전공과목의 대학원 수준 학문을 닦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이것이라 생각했다.
뇌피셜에서 오피셜로. 검증된 자료, 석사 이상의 학술 연구 결과를 차용하는 논문을 활용할 줄 아는 지적 수준으로 살아간다는 실질적인 성장. 나는 교육대학원 특성상 직업을 병행하며 공부한다. 직업이 일상인 내가 공부와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 성숙한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논문 작성은 3학기~4학기 즈음까지 차차 실력을 쌓아가더라도 서치와 리딩 능력은 지금까지와 다른 수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읽기는 어렵지만, 논문이라는 것이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고, 왜 쓰였으며 어떤 효용이 있고 어떤 수준의 지식 정보인가에 관해 논문 스터디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라디오 7회 대본을 쓰는데, 내 글의 오점. 정확하게는 내 생각의 오점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생각의 근거는 뭔데?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이 용어를 정의하는 건 이게 최선이야? 이 용어는 학계에서와 일상에서 어떻게 다른데? 이 말은 이론적으로 검증된 연구 근거나 레퍼런스가 없어도 돼? 등등..
얼렁뚱땅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던 그럴듯한 내 문장력 뒤에 감춰진 수준의 실체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하루 이틀 전에 대본을 보내주면 된다는 라디오 작가님의 말씀에 차일피일 미루다 전날에 마감효과로 바짝 쓰곤 했던 내가, 이 모든 걸 깨달은 이후엔 대본 쓰는 진도가 좀처럼 나가질 않았다. 어제 오후 늦게서야 원고를 넘기고 다음날인 오늘 녹음을 다 끝마치긴 했지만. 내가 너무 얕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석사 졸업 논문의 주제를 뭐로 낼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엔 그보다 내 라디오 대본의 수준이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있어질 것인가에 꽂히고 말았다. 앞으로도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겠지만,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만은 분명하다.
방송에 나가는 라디오 대본을 쓰는 관점이 달라지면 내가 말하는 것에도, 내가 대본 이외에 쓰는 글에도, 또 학기 수업을 듣는 태도와 끝내는 석사 논문 작성의 과정과 결과까지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 이 얼어붙은 뇌를 깨부수고 말랑말랑하게 녹이는 작업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달라질지 가늠할 수 없는 '초심으로 만든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조금씩 나아지는 내 모습을 스스로 느끼며 성장함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당당함으로 계속될 것이니.
매일 논문을 찾고, 읽고, 써먹어야겠다. 수준을 높여야겠다. 깊이 있는 작가&강사로 무럭무럭 자라기 위하여. 수강생들의 만족까지 이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