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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Feb 06. 2023

신이 내 '기도'를 듣는 것만 같다

내가 미친 건 아니다. 미쳐가는 것도 아니다. 믿으라는 글 역시 아니다.

신이 있다고 믿는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니 불편해하지 않아도 좋다. 첫 문장부터 신을 운운하는데, 종교 이야기는 배제한다니 뭔 말인가 싶겠지만.

현재 나는 무교다.


어렸을 적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성인이 되어서는 기독교 동아리를 함께한 대학 동기에게 속아 성경공부 명목으로 사이비 종교를 3개월 정도 체험(!)해보았다. 덕분에 내 지금 대부분 종교관이 형성됐다. 사이비만 아니라면 특정 종교를 옹호하지도 배척하지도 않는다.


근데 왜 신이 있다고 믿게 되었냐고?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이 규정한 어떤 판타지든 실체가 있는 무엇이든 간에 내 삶에 관여하고 있단 생각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계기는 이렇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간혹 기도를 드릴 때가 있다. 헌금도 안 내고 예배도 안 드리면서 무교라고 주창하는 나에게 그 신이라는 존재가 내 기도를 자꾸 들어준다는 착각이 들면서부터 이 이상한 믿음이 뿌리내렸다.

가끔 글에 이런 말을 쓰곤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착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딱 그 정도다.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착각하기로 한 것이다. 종교 활동 따윈 하지 않는 내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의 기운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웃기는 건 무교인 내가 기도를 이따금 한다는 사실이겠다. 처음엔 내가 생각해도 다소 부끄럽고 뻔뻔하다고 느꼈다. 유치부 때부터 유년부 토요예배, 여름성경학교, 청년부 수련회, 송구영신 예배 등등에 빠지지 않으며 개신교 교리를 익히던 내게 남아있는 최소한의 죄의식이다.


신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태도로 기복신앙을 가지는 건 종교적 상식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죄의식을 가질 만큼 나쁜 일인가?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선택이 아니고, 종교를 가지지 않고, 일종의 명상처럼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중얼거리는 거라면. 이때의 양심이라는 추상은 세뇌된 종교의식에서 발현된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신이 기도를 들어준다는 걸 어떻게 느끼냐고? 내가 아주 가끔 명상처럼 기도를 드리면, 목사님이 어렸을 때 알려주시기로 ‘응답’이라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되는데, 그게 참 신기할 노릇이다. 주로 내 기도 내용은 ‘이런 기회를 주세요.’라는 건데, 그런 기회가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찾아온다는 게 웃긴 거다. 에이, 우연 아닌가. 무슨 신까지 들먹이느냐 하면 나름 할 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와 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카메라 세례를 받고 싶다는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라든지, 코로나 19 사태로 주 수입원이던 강의와 모임이 올스톱되어 수익이 0원이 될 뻔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갑자기 생겼다든지. 어찌할 줄 모를 때 때맞춰 연락이 온다든지 하는.


다시 말해 내가 참다 참다가 기도랍시고 바라는 걸 중어리기만 하면 기회로써 내 앞에 다가와 선택으로 주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신을 믿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이의 신이라기보단 내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라는 말이 맞겠다.

우주의 기운이라거나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종교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현대 버전의 사자성어로 ‘정신승리’라고 해도 할 말 없다.


이런 말들이 얼핏 들으면 배부른 소리 같겠지만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든다. 하나는 가끔 하는 기도가 실질적인 기회를 가져다주는 대신 오롯이 내 선택에 그 결과가 달렸기 때문에 내가 선택을 삐끗하면 나 자신을 무한 자책하게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너무 신기해서 두렵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내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가 나에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베풀며 기여한다면 이대로 살아갈 가치의 정당성을 얻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말이다.


또 강하게 드는 감정이 있다면, 이 모든 걸 인식하는 순간부터 내가 종교 활동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며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감정이다.


나는 다만 '운'이 좋은 것인가.


내가 내 책에다 썼던 구절, ’간절하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면 이루어진다.’라는 아포리즘이 동기부여 자극 명언으로 인터넷에 돌고 있는 걸 얼마 전 발견했다. 나는 사실 간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계속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결과가 시간이 흘러 나타난 건 아닐까.

기도의 횟수를 늘리면 어떻게 될까? 응답 확률이 더 낮아질까 높아질까? 한때 자각몽에 빠져 현실이 싫어졌던 경험 혼란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꽤 비슷해서 이만큼 또 위험한 생각도 없다는 결론에 쉬이 다다른다.


다음은 내가 군 시절에 버텼던 한 문장인데, 코란 경전에 있다고 알고 있다.

신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 안에 있다.


어쩌면 내가 만든 환상 안에 있는, 그 착각 속에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신이라는 존재는 그저 존버하는 내 안의 인내심이었던 건 아닐까?

우주 속 먼지라는 관점에서 개인에 불과한 나를 바라보면 한낱 웃기는 짬뽕 같다. 이 사유가 나에게 남기는 하나는, 멋대로 살되 이 정도 버티며 사는 건 특별히 운이 좋은 줄 알라는 거울 속 나를 향한 직시 경고 내지는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이 자식아, 범사에 감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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