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초월번역한 에세이 «오역하는 말들»황석희 번역가

트레바리 독서모임에 제출한 독후감

by 이동영 글쓰기 쌤

책 읽는 내내 글을 쓰는 작가로서 공감했다. 마감일자에 맞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전후 맥락에 맞게, 독자를 의식하며 고쳐 쓰는 작업은 번역가의 작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오역에 관한 고찰도 번역(글쓰기)을 관계와 소통의 은유로 풀어내는 방식도 익숙했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아티스트보다는 테크니션에 가깝다고 자평했지만, 사실 예술의 어원에는 기술도 있다.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기술을 구사하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는 것이 번역가가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 역시 대중을 대상으로 문학적인 글보다는 기술적인 글을 쓰는 작가이기에, 저자와 내적 친밀감 같은 것이 생겼다.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구절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실제로 저자가 온라인상에서 학력이나 번역 관련해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았을 때,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악플러 코를 납작하게 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낀 적이 있다. 그 당당함의 기저에 이러한 멘탈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종종 근거 없는 공격을 받곤 한다. 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가 나를 작가로서 비난하고, 내 강의를 들어보지 않은 이가 나를 강사로서 깎아내린다. 예전에는 그럴 때마다 감정이 앞섰지만,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무가치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한때는 악플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며 반추했던 적도 있다. 이 문장은 그런 나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누군가에게 터무니없는 비방을 들었을 때, 누군가 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매도하거나 오해할 때 이 문장은 종종 내 방패가 되어 준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를 형편없는 번역가, 못난 부모라고 한다 해서 내가 형편없는 번역가나 못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위나 권리가 전혀 없다. 그러니 남들의 말에 딱히 휘둘릴 일도 아니다.] 본문 91p~92p

저자가 포착한 이런 세밀한 시선이 좋았다. ​객관적인 비평과 무분별한 비방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작가를 '정의를 내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타인을 함부로 정의 내리는 행위는 무례한 오역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다. 함부로 충고하고 조언하며 평가하고 판단하는 태도만 거두어도 타인을 존중할 수 있다.

​관계에서도 번역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한국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는 건 착각이다. 살아온 환경과 경험, 사고의 깊이에 따라 같은 단어도 저마다 다르게 개념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 오역하지 않는 관계를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존중, 함부로 정의 내리지 않으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 나만의 정의를 지키면 나답게 살 수 있지만, 존중이 전제가 된 타인과 공동체의 정의 또한 존중해야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오역의 문제는 '뜻이 통하지 않음'에 있다. 저자가 번역가로서 이름을 날린 건 오역이 판치는 와중에 정역을 넘어 초월번역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관객의 관점에서 즐겁게 몰입하며 감상하기에 편하도록 번역해준 덕분이다.


그렇다면 평상시 관계에서 소통의 정역은 어느 수준까지가 적정한 걸까. 상대를 존중하는 전제로 최소한의 말(글)의 품격을 지키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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