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동 Aug 16. 2020

식용 곤충

 벌레는 어려서부터 무서워했다. 모두가 잡아본다는 잠자리도 '나도 한번 잡아야지.'라는 생각에 다가가 보면 막상 무서워서 가지도 못했더랬다. 어린이 때는 벌레만 보면 호들갑도 떨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속으로 삼키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아직도 벌레 사진도 제대로 못 보고 사진이나 그림이더라도 만지는 것도 거부감이 든다. 그토록 싫어한다. 이 글을 작성해 내려가는 지금도 갑자기 튀어나온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난리 법석을 쳤다.


 내가 하고 있는 초등학교 수업 교재에 '식용 곤충'에 대한 글이 나온다.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가축 생산량을 무한정으로 늘릴 수 없는 이 시점에서 대안으로 나온 곤충 식량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글에서 식용 곤충은 유망한 미래 식량으로 매우 경제적이며, 영양이 풍부하고 친환경적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물론,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게다가 환경에 꽤나 관심이 많아 대학생 때 환경 소모임도 들어 관련한 이야기들을 매주 경청했다. 육식을 너무 사랑하여 완전한 비건은 하지 못하지만 간헐적 채식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실 곤충 식량에 대해 머리로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못하지만.


 나만큼 곤충을 태생적으로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약간의 불쾌함만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곤충 식량은 영 당기지 않는 식량일 것이다. 그러니 식용 곤충이 상용화되려면 곤충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캠페인이나, 홍보부터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식용 곤충이 정말 이 세상에 당연시될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미 숨을 거뒀거나, 삶의 남은 시간이 보낸 시간보다 적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나에게 조금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한편으론 가르치는 학생들은 4~50대, 그들이 중년일 때 보편화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아이들에게 "너는 식용 곤충을 먹을 수 있겠어?" 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미 과자 같은 '밀웜'을 먹어봤다는 학생도 있었고 ―이 학생은 밀웜은 과자 맛이 나기 때문에 이런 거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대다수의 다른 학생들은 아무래도 벌레는 싫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새로 나와 같이 하게 된 도마뱀을 좋아하는 J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곤충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친구였다. 특히 매미의 종류를 나에게 너무 상세하게 알려주고 그들의 눈의 개수까지 설명해줄 정도로 열정적인 벌레 선생님이었다. ―나는 사실 이 과정에서 티는 최대한 내지 않았지만 굉장히 힘들었다.― 어떤 매미가 눈이 5개가 달려있다고 하기에. "헉, 정말 징그러웠을 것 같은데?"라고 되묻자 그는 "아뇨. 눈동자가 흰자가 없이 검은색으로만 있고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귀여워요."라는 대답을 해줬다. ―이 대화를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손에는 땀이 나고 있다.― 어쨌든, 나는 놀라워서 그렇다면 너는 식용 곤충에 대해서 나쁜 생각이 없겠네?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도 식용 곤충이 싫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역시 먹는 것은 역겹긴 하겠지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뒤 이은 그의 대답은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먹지 못하겠어요."


 나도 최대한 채식을 하려 하고, 육식을 줄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생명을 존중하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나는 곤충이나 여타 내가 좋아하지 않은 것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밀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곤충을 아무리 싫어한다 해도, 그들의 몸이 아주 작더라도 그들도 엄연한 한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경시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곤충을 누구나 함부로 할 것이라는 생각을 왜 전제로 깔고 가는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너무 부끄러웠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통하여 우리는 동물들 사이에 진화적 연속성이 있음을, 우리와 달라 보이는 동물들이 실제로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와 다른 생물들 사이에서 서열관계가 있다는 개념은 다른 생물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를 당연시하는 데 사용된다. 이런 종우월주의를 나는 최대한 멀리하려 했다. 나는 집에 또 다른 가족과 사는 입장으로 다른 생명에게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리라 속단했다. 그런데 이는 한 초등학생에 의해서 무너졌다. 내가 싫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무지하다는 이유로 어떤 생명들은 존중하지 않고 경시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내가 벌레나 곤충을 사랑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그토록 미워해야 하는지는 이제는 모르겠다. 사실 이것도 머리로만 이해하는 일 일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 고작 몇 년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기에는 이렇게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그들이 인격을 형성하고 이후의 삶을 계획해 나가는 시기에 만나는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작은 영향을 끼치더라도 그중 하나겠지. 아무리 작은 영향이더라도 나와 만나는 학생들이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 먼저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겠지.

작가의 이전글 30살 인생 첫 충치를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