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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동 Aug 05. 2020

30살 인생 첫 충치를 만나다.

 21살 때 입안에 있는 모든 사랑니가 거지같이 났다는 것을 알고 매복 사랑니 발치만 3개를 했다. 왜 3개냐? 한 개가 안 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저번 주에 스케일링을 하다 "안 시리세요?"란 말을 치의생사에게 듣고, "제가 왜 시리죠?"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충치가 생겼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이동동 태어나 최초의 충치. 그것은 오른쪽 상단 어금니였다.


 이유는 이러했다. 딱 하나 나지 않았던 오른쪽 상단 사랑니는 9년 동안 몰래 힘을 키워와 결국 '진짜' 거지같이 자라났고, 그 옆 어금니를 괴롭혀 충치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이동동은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다음날 사랑니 발치와 충치치료를 감행했다.


 기를 모은 뒤에 자라난 사랑니라 그런가 그 녀석은 어떤 뼈 밑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치과 의사조차 나에게 "이 놈, 너무 깊어서 발치 후에 코 공기주머니 부분이 뚫릴 수도 있겠는걸요?"라며 선견제 압박을 시전 했다.


 고작 사랑니 뽑는 데 뼈를 잘라야 했다. 마취주사는 새드무비보다 눈물을 쏟게 했지만, 뼈를 깎는 느낌은 정말이지…. 어쨌든 뼈를 깎아 사랑니를 뽑고 나니 입술에서도 피가 나있었다. 하도 깊숙한 곳에 있어서 의사선생이 나를 마구 짓눌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의사도 말했지만 나는 열고 있는 입 때문에 아프다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린 수술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입으로 들어간 물이 코로 나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공기주머니까진 뚫리지 않았구나 안도했다.


 그다음은 충치치료였다. 차라리 3년 전에라도 발병되었다면 8만 원은 벌었을 텐데 금값이 천정부지로 솟은 지금 금니를 씌우게 되었다. 나는 호구였다.


 전체 크라운은 아니었지만, 어금니 일부분을 잘라냈다. 마취주사 덕분인가 이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사랑니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줄로만 알았다. 오늘, 사랑니 실밥도 뽑을 겸, 금니도 씌울 겸 간 치과에선 《시리다.》의 제대로 된 정의를 각 잡고 배우게 되었다.


 "시려요."


 이 말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말이었을까? 어제 나를 웃으면서 버피테스트시키던 요가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해 보였는데, 그것은 내 과오였다. 슬러쉬에 꽂힌 빨대를 27개 정도 동시에 흡입하면 이렇게 시리려나? 정말 대가리가 깽! 마치 쟁반노래방에서 쉬지 않고 틀려서 쟁반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이런 고통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줄 알았다. 치과 치료가 끝나고 부대찌개를 조지러 온 나는 따신 국물을 한 사바리 마시는 순간 다시금 치과의자에 앉은, 아니 순식간에 저 세상 프리패스를 끊은 사람이 되었다. 무서워 치과에 전화해보니 뼈가 차오르는 2주 까진 차갑고 뜨신 것을 마시거나 먹을 땐 시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음 주 내 생일파티 메뉴는 평양냉면이기 때문이다.


 30살, 결코 적지 않은 나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 생각하며 많은 것을 경험해보자 했건만 이런 경험은 원하지 않았다.


 인생 첫 충치, 수많은 교훈을 남기고 간다.

 오늘도 난 분노의 양치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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