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1619-1637][합스부르크 왕조]
1. 이름 :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2. 왕조 : '합스부르크 왕조'
3. 대략의 분위기
페르디난트 2세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교육을 받아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친개신교 성향의 마티야스 세력이 일어나자 가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 2세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왕에 추대되었는데 문제는 보헤미아 지역이 신교도의 기가 엄청 센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위까지 오르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중재를 시도했던 추기경 멜히오르 클레즐(Melchior Khlesl)이라는 인물을 죽이면서 사실상 개신교와의 전쟁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게 그 유명한 30년 전쟁의 시작점이 된다.
애초에 30년 전쟁에 들어가기 전 페르디난트 2세를 위시로 한 가톨릭 세력이 많고 틸리 백작(Johan 't Serclaes van Tilly)과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의 활약 등이 더해져 양측의 벨런스는 애초에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대로 30년 동안이나 전쟁이 이어진건 타협 없이 개신교를 누르려는 페르디난트 2세의 고집 때문이었다. 결국 가톨릭이었던 프랑스가 이해득실을 계산한 뒤 개신교 쪽으로 붙고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2세도 신교 쪽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되어버린다.
4. 주요 키워드
1) 30년 전쟁
세계사 시간에도 중요한 사건으로 나오는 이 30년 전쟁이 페르디난트 2세 때 일어난 사건이다. 정확히는 페르디난트 2세 때문에 장기화되었다고 봐도 될거 같다. 이 전쟁은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불리는데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두 세력 아래 유럽의 많은 나라와 세력들이 한쪽 편을 선택해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위에서도 언급한대로 강국 프랑스는 종교의 개념 없이 국익에 따라 한쪽을 선택하는 모습도 보이면서 국익 앞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현대적인 개념도 이때 생겨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총 4차에 걸쳐 진행되었데 페르디난트 2세를 위시한 가톨릭 세력은 우세한 전력과 명장들이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교 세력을 압도하지 못했다. 결국 서로 부담이 되었는지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료하게 되는데 이게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이 합스부르크 왕가다. 스페인 쪽 합스부르크 가문은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하게 되어 어마무시한 피해를 입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쪽도 연합의 힘이 느슨하게 되었고 이는 새롭게 등장하는 독일의 전신인 강국 프로이센의 성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 페르디난트 3세 [재위기간 1637-1657]
페르디난트 2세에 뒤이은 왕이 같은 이름의 페르디난트 3세다. 이 왕을 단독으로 적어보지 않고 페르디난트 2세의 항목에 넣은건 이 사람의 특징이 너무 없는듯해 보여서다. 여러 자료를 찾아봐도 이 황제 재위기간에 '3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것과, 독일의 여러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외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는 내용만 나와 있다. 역시 앞에서 언급한 '30년 전쟁'으로 피해를 받은 합스부르크의 연속선 상에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맘때 황제들의 사진들을 보면 '합스부르크'의 상징인 주걱턱의 모습이 나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당장 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안나도 합스부르크의 피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일찍 죽어 순위가 뒤였던 4남이었던 레오폴트 1세가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